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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전호 Aug 11. 2020

오늘은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

조지아의 와인

목적지가 있다. 가야 할 곳. 오늘의 목적지는 카즈베기다. 조지아의 북쪽. 마을을 둘러싼 산세가 아름다운 곳이란다. 지금은 겨울이니 설산도 볼 수 있겠지.

나는 목적지가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그곳을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를 때 약간 흥분이 된다. 아니, 흥분보다는 정신이 선명해진다고 하겠다. 혼자 여행하는 시간이 늘어갈수록 내 안에 쌓여가는 습관이다. 목표가 생기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약간의 모험이 가미되는 상황. 그것들이 즐겁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혼자라는 사실에 피식 웃고 만다. 오늘은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 다짐하고 짐을 챙겨 숙소를 나왔다.



야무지게 여민 옷깃 사이로 찬 바람이 칼 같이 파고든다. 앞 뒤로 단단히 맨 배낭의 무게가 어깻죽지에 전해지면 비로소 오늘의 여행이 시작된다. 특별할 것은 없는 날. 그저 카즈베기에 도착만 하면 되는 날. 모든 것이 단순하고 선명해진 오늘 같은 날. 이런 날은 그저 앞만 보고 걸으면 되는 날이다.


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여러 호객꾼들이 말을 붙인다. 커다란 배낭을 메고 있는 나 같은 여행자는 이들에겐 반가운 손님이다. 적당한 출발 시간과 적당한 가격에 흥정이 끝났다. 혹 내가 다른 차를 찾을까 불안했는지 턱수염이 무성한 기사 아저씨는 일단 내 배낭을 자신의 트렁크에 날름 싣는다. 출발하려면 한 시간 남짓 남았단다. 웃으며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오란다. 출발시간이 한 시간 남은 것이 아니라 택시를 가득 채우기 위한 손님을 모으는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이다. 덜렁 나만 혼자 태우고 가기엔 수지가 안 맞을 테니.



조지아는 커피보다는 와인이 유명하다. 적당한 카페에 자리를 잡고 샌드위치와 와인을 시켰다. 영어가 잘 통하지 않아 그냥 추천해주는 와인을 글라스로 한 잔. 샌드위치의 빵은 딱딱했고 속을 채운 야채는 시들했지만 와인은 괜찮았다. 이 나라의 와인은 그런 힘이 있다. 목을 타고 넘어온 와인은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데워준다. 겨울의 조지아에선 하루에 몇 잔이고 와인을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상하게 취하지도 않는다. 절반쯤 먹은 샌드위치는 내려놓고 와인을 조금씩 마신다.

앞만 보고 걸으면 되는 날.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 다짐하며 시작된 여행의 하루는 몸과 마음을 데워주는 와인으로 기운다. 배낭 속의 소설책을 꺼내 읽어야지 생각하다 이내 배낭은 이미 택시의 트렁크에 들어가 있다는 걸 깨닫는다. 할 수 없이 와인을 마시며 소설의 뒷 이야기를 혼자 상상해본다. 하고 싶은 일을 당장 하지 못할 때는 그것에 조금 비켜선 방법을 찾으면 된다. 삶을 겸손하게 대하는 연습이다. 받은 게 있다면 내놓는 것이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이 목적지를 향해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혼자 하는 여행이 내게 알려준 것이다.


카페의 종업원에게 와인에 대해 묻자 그냥 조지아 와인이란다. 조지아 와인은 믿고 마셔도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해맑게 웃으며. 사뭇 자신의 나라의 와인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덮어놓고 믿어도 좋다 소개할 수 있는 것이 나에게도 있었던가. 자만과 자부심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에서 항상 비겁했던 내가 보인다. 잔 안에서 찰랑거리는 와인에 비친 내 모습이 어색하게 비뚤다.



비뚤어진 채, 오른발과 왼 발이 서로 짝을 맞추지 못하고 한쪽으로 기울어 걷고 있다는 걸 알게 된 날이 있었다. 어느 한 곳을 목적지로 삼아 시작점에서 곧은 직선을 긋고는 그 위를 성실하게 걸어왔다 생각했는데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한 날. 다른 곳에 도착해버린 날. 길 위에서 돌아본 내 발자취는 직선은커녕 모호하게 뒤틀려 있었다.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갈 힘도 새로운 목적지를 찾을 힘도 없었기에 나는 차라리 미아에 가까웠다.


제대로 살아보자 다짐하고 이제는 집착을 버렸다. 몸도 마음도 가볍게 하려 노력한다. 그러므로 앞만 보고 걷는 것은 사실 앞만 보고 걷는 게 아니다. 조용히 마음에 집중하여 마음의 짐을 조금 덜어주는 일이라 하겠다. 짐이 덜어진 마음은 결국 그곳이 어디든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카즈베기에 도착하지 못하더라도 괜찮을 것 같다. 내가 하루를 끝내는 곳이 오늘의 목적지일 테니까.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적어도 우리는 길 위에서 그 많은 기회들을 직면한다. 나의 가장 빛나는 모습도, 가장 어두운 모습도 결국 길 위에선 작은 점 하나에 불과하다. 그 작은 점의 안간힘이야 멀리서 보면 얼마나 보잘것없겠는가. 하지만 그 작은 점 안의 나는 오늘도 다짐하는 것이다. 어떤 모양이든 나의 삶이, 나의 여행이 당신 안에서 잘 살 수 있는 그 여정 안에 놓여있길.


마지막 남은 와인을 들이켰다. 한 시간이 지났다. 이제는 택시를 타러 가야 한다. 마음이 조금은 따듯해져 오늘 카즈베기에선 한 명쯤 만나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오늘 같은 날은 마음이 향하는 방향이 틀어져 목적지가 달라져도 괜찮은 것이다.




가르치고, 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글을 씁니다.
저서로는 “첫날은 무사했어요” 와 “버텨요, 청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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