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마루에서 오봉산을 바라보는 일상

구례 운조루 누정

by 온형근

구례 운조루는 만물이 생동하는 초봄(3월)의 계절감과 정취를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공간이다. 샛노란 산수유와 붉은 동백, 분홍빛 위성류가 피어나는 봄날의 생생한 풍광을 통해 독자들에게 봄의 기운을 선사하기에 제격입니다. 또한, 한국 전통 원림이 단순히 자연을 완상하는 곳을 넘어, '조경적 자부심(현시욕)'과 '이웃을 향한 깊은 배려'가 어떻게 한 공간에서 아름답게 공존하는지를 보여주는 탁월한 문화유산이다.


주요 내용

자랑거리인 위성류와 화오(花塢): 운조루 사랑 마당의 작은 흙담 화단(화오)에 심어진 귀한 나무인 위성류(Tamarix chinensis)를 조명합니다. 수양버들처럼 늘어지는 가느다란 가지와 분홍색 꽃을 뽐내는 이 나무를 통해, 주변에 없는 식물을 가꾸며 정원을 돋보이게 하려 했던 주인의 조경적 자랑을 만납니다.


타인능해(他人能解)와 기단 굴뚝의 배려 철학: 누구나 쌀을 가져갈 수 있게 한 쌀뒤주 '타인능해'와, 끼니를 거르는 이웃이 밥 짓는 연기를 보고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연기가 밑으로 흩어지게 만든 '기단 굴뚝'을 다루며 운조루 특유의 나눔과 배려의 정신을 깊이 있게 다룹니다.


족한정(足閒亭) 누마루와 풍수적 명당: 사랑채 누마루인 족한정에 앉아 차를 마시며 대문 밖 만개한 산수유와 안산인 오봉산을 바라보는 일상을 묘사합니다. 더불어 지리산 노고단의 기맥이 내려오고 섬진강이 흐르는 완벽한 배산임수의 풍수지리적 명당 조건(좌청룡, 우백호 등)을 설명합니다.


매천 황현의 시로 보는 옛 선비의 원림 향유: 매천 황현이 이산 유제양을 떠올리며 지은 회인시(懷人詩)를 통해, 한 쌍의 백학을 기르고 연못의 연꽃을 감상하며 당시(唐詩)를 탐독하던 선비의 고상하고 풍요로운 원림 생활을 소개합니다.


매력 포인트

자랑과 겸손이 교차하는 역설의 미학: 돋보이고 싶어 화려하고 귀한 위성류를 마당 한가운데 심은 인간적인 매력(현시욕)과, 행여나 이웃이 상처받을까 굴뚝을 바닥으로 낮춘 지극한 겸손함(배려)이 극적인 대비를 이루며 깊은 감동을 줍니다.


오감을 자극하는 화려한 봄의 색채감: 암갈색 줄기에 피어난 분홍빛 위성류, 대문 밖 장원의 샛노란 산수유, 붉은 입술을 내미는 동백, 그리고 족한정 마루에 꽂힌 4색(백, 홍, 청, 분홍) 매화까지, 봄날의 다채로운 색채가 한 폭의 수채화처럼 그려져 시각적 즐거움을 극대화합니다.


삐거덕대는 마루에서 누리는 한가로운 쉼: 고색창연하고 닳은 우물마루에 앉아 황차를 우리며, 지리산의 맑은 바람과 섬진강 들판의 기운을 느끼는 묘사는 쫓기듯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구름이나 새(운조, 雲鳥)가 된 듯한 궁극의 여유와 안식을 선사합니다.



구례 운조루 누정 – 누마루에서 오봉산을 바라보는 일상


운조루 사랑 마당의 자랑거리 – 수양버들 닮았으나 잎은 향나무 느낌인 위성류

곧추서서 위로 곧게 자라던 운조루 사랑 마당 화오의 위성류 원줄기는 온데간데없다. 새로 나온 줄기가 암갈색으로 거칠게 갈라져 고풍의 아취로 마당을 향해 뻗는다. 뒷줄기도 질세라 서향으로 줄기를 고쳐 자란다. 화오(花塢)는 작은 흙담에 꽃나무를 심어 즐기는 화단으로 한국정원문화의 백미이다. 화오는 전통조경에서 시설물 중 화계와 함께 식재 시설에 속한다(김충식, 전통조경 복원정비 기준마련, 문화재청, 2022, p.37.). 화계(花階)가 축대처럼 섬돌(階)을 만들어 층단으로 식재하는 화단이라면 화오는 보통 1단으로 만든 화단이다. 사랑 마당 서쪽 화오에 식재한 위성류(Tamarix chinensis Lour.)는 부근의 다른 집에 없는 귀한 나무여서 자랑거리이다. 잎은 침엽수를 닮았으나 실상은 낙엽활엽수이다. 은행나무와 함께 형태와 생태가 서로 비교되는 나무로 각종 시험에 자주 출제된다. 가느다란 가지는 늘어져 푸른 안개 낀 듯 눈매가 시원하다. 분홍색 꽃은 암갈색 줄기를 배경으로 더욱더 화려하고 곱다. 어느새 위성류 한 그루만으로 사랑 마당이 꽉 차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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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조루의 정신으로 타인능해(他人能解)와 기단 굴뚝이 있다. 이 둘은 모두 선조로부터 내려온 나눔과 베풂의 실천 덕목에 합치한다. 깊은 사유를 지닌 배려의 산물이다. 타인능해는 뒤주에 쌀을 담고 잘 보이는 곳에 놓는 데서 출발한다. 누구라도 열어 필요한 쌀을 가져가게끔 하였다. 기단 굴뚝은 밥 짓는 연기가 담장 위로 오르지 않고 기단 구멍에서 흩어지게 하였다. 끼니 거르는 사람의 오감에 의한 소외감 증폭을 예방하자는 구체적 실천 조치이다. 이처럼 뒤주와 기단 굴뚝은 철저하게 남의 심사를 정성스럽게 살피는 행위이다. 그런데 사랑 마당의 위성류는 다르다. 돋보이기 위한 조경 식재이다. 독보적 우월의 식물 현시욕이다. 그러고 보니 유제양(1846~1922)과 손자 유형업(1886~1944)의 조경식물에 대한 접근 방법은 같으면서도 많이 다르다. 조경식물에 대한 애정어린 관심과 배양, 식재 행위가 같고, 꽃을 사랑하는 조부의 ‘애화(愛花)’와 손자의 ‘애림(愛林)’은 성격이나 다루는 질적 가치로는 약간 다르다. 조부인 유제양 때의 토지가 손자 시대에 절반 가까이 줄 탓일까. 손자는 밤나무를 집단 식재하여 밤 농사를 짓고 참나무를 심어 도토리를 수확하여 가계를 윤기있게 꾸렸다. 소위 산림 경영의 일환으로 유실수를 도입한 것은 손자인 유형업이다.

조부인 이산 공께서 돌아가신 1922년은 일제에 의한 조선의 식량 기지화의 시대로 암울했다. 수리조합비, 비료 대금 등을 농민에게 전가하고 식량 수탈이 심했다. 국내 식량 사정이 악화하어 만주에서 잡곡을 수입하여 식량으로 보충하였다. 돌아가신 이듬해 제작한 영정 사진에는 활짝 핀 매화 분매가 가깝게 놓였다. 말년의 하얘진 모발과 수염이 분매의 흰 꽃 배경에 더욱 빛나서 하양만으로 눈부시다. 왼손에 살포시 잡은 책이 금방이라도 펼쳐질 듯 임장감이 생생하다. 손자 유형업은 화엄사 길상암의 ‘화엄매’를 보았을 것이고 분양받을 수 있었다. 일제의 수탈에 견디고 식솔을 줄이며 운조루를 지켜내는 일은 순전히 손자의 몫이고 주어진 사명이다. 그런데도 선대에서 식재한 조경 식물은 여전히 사랑 마당의 위성류처럼 운조루를 고풍스럽게 이어간다. 조부 유제양이 화엄사 등지에서 귀한 식물을 구해 운조루의 조경 식물로 활용하였다면 손자인 유형업은 나무 심고 가꾸는 종수애림(種樹愛林)을 십년지계로 언급하고 가계 경영의 목적으로 대량 식재를 하였다.


한가롭게 머문다는 운조루 누마루 족한정(足閒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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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조경가 ■시집 : 천년의 숲에 서 있었네 외 5권 ■한국정원문화콘텐츠연구소 ■월간 조경헤리티지 ■조경수목 문화콘텐츠(2019) ■시경으로 본 한국정원문화(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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