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경관 학자, 진경산수 비평을 개척하다

제천 옥순봉 원림

by 온형근

시경으로 읽는한국정원문화

제천 옥순봉 원림 - 조선 최고의 경관 학자, 진경산수 비평을 개척하다.

제천 옥순봉 원림 - 정상 필자.png 옥순봉에서 아끼는 후배와 기억을 새기다 (2023.04.23.)

다섯 살 때 홍천 범파정 탐방을 시작으로 함흥의 풍월강산 주유천하까지


새로 지은 아파트 단지는 철마다 새롭다. 피고 지는 꽃의 표정에서 신록에서 성록으로 짙푸르다. 무엇보다 나무에 매단 수목 표찰의 쓰임새가 놀랍다. 초중고 학생이 등교한 후인 9시 이후는 갑자기 세상이 고요하다. 어린이집 등원하는 아이와 엄마의 정다운 대화 정도의 속삭임에 이끌린다. 아이가 엊그제 환했던 꽃을 기억한다. 꽃 지고 무성한 잎만 매달린 커다란 나무 앞에 멈춘다. 그 아이 몸통과 비슷한 굵기의 나무줄기와 마주하였다. 저만치 언덕 위 앞서던 엄마가 뒤돌아 아이를 쳐다본다. 아이가 한참이나 쳐다보는 나무를 보더니, "나무 이름이 뭐라고 써져 있어?"라고 소리 높여 묻는다. 아이가 엄마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조그만 가방을 비비 꼬면서 "왕덕나무"라고 대답한다. 엄마가 바로 이어서 "왕덕이 아니고 왕벚나무"라고 또박또박 발음하며 바로잡는다.


저 어린 순수의 지적 영역에 '나무 이름'이 놀랍게 새겨지고 있는 순간이다. 아울러 한글 해득의 순리가 저렇게 날개를 달면서 엄마로부터 시작한다. 나무 이름 하나 제대로 모르고 살았던 나의 세대와는 출발점 행동이 다르다. 나는 그때, 겨우 아까시나무 정도나 알았을까? 그렇다면 5살에서 89살까지 산수 원림의 명승을 찾아 수차례 죽을 고비를 마다하지 않고 답사한 조선 최대의 경관 학자는 어떠한가. 3천여 한시와 여행기, 시조, 가사를 남긴 겸재 정선의 친구이자 수암 권상하의 큰 조카인 옥소 권섭(玉所 權燮, 1671~1759)을 만난다. 태어난 해는 고산 윤선도가 세상을 떠난 해이기도 하다. 서울 삼청동에서 출생한 그해, 비바람에 놀라 무릎이 오그라들었는데 남효원의 침술로 치료하였다는 연보를 보며 놀란다. 무릎이 그때부터 남다른 비법에 들었을까. 5세 때 어머니를 따라 외조부의 홍천 임지에서 범파정 물놀이를 시작으로 그의 산수 유람은 시작한다.


하지만 책에도 아쉬움이 많고. 산수에도 남은 한이 있어서. 내 나이 여든일곱이지만 도깨비 같은 수완을 부리니 스스로도 껄껄 한바탕 웃음이 날 지경인데, 이번 북로행을 두고서도 조롱하고 우습게 여기니, 어찌할 거나! 어찌할 거나! (…) 내가 한평생 나라 안을 살살이 돌아다녔어도, 유독 함경도 길만은 꿈속에서 아른아른거려 생각이 그치지 않았다. 이제 사촌 동생 자장이 함경도 감영에 관찰사로 있으면서도 나를 늙은이로 여겨 사람을 보내 맞아 주지 않아서, 내가 자비로 나서려 하니 아이들과 여러 친족들 모두가 애써 말렸다.

—권섭, 「원유기(遠遊記)」 『삼천에 구백리 머나먼 여행길』, 문경시, 364쪽.

87세에 사촌 아우의 임소인 함경도 함흥을 여행하고 거기서 동갑 기녀 ‘가련’과 서로 주고받으며 읊은 시조를 한역하였으니 ‘멀리 유람한 것을 적다’라는 제목의 ‘원유기(遠遊記)’는, 세상과 하직하기 2년 전의 함흥 산수 유람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권섭에 대하여, 그의 작품 세계가 내용이 다양하고 사실적이며 깊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문필 유산 가운데에는 한시·시조·가사 작품 외에도 유행록(遊行錄)·기몽설(記夢說) 등이 있어 그 내용이 광범위하고 섬세하다고 평가받는다고 적는다. 평생 기이하고 절경인 경관을 탐구하고 원림을 경영한 조선 최고의 경관 학자의 실천적 삶을 들여다보면서 가슴이 뭉클하다.


권섭의 또 다른 호는 '백취옹(百趣翁)'이다. 백 가지 취미를 지닌 늙은이라는 뜻이다. 무명옹(無名翁), 천남거사(泉南居士)라는 호도 있다. 이름이 없는 노인, 남쪽 샘가에 사는 거사. 이 이름들이 모두 권섭이 스스로 지어붙인 호이다. 경관 탐구에 있어 형식과 이름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정신이 호 하나에도 배어 있다.


결습(結習)이라는 이름의 불치병 — 경관을 향한 뿌리 깊은 습성의 해부


권섭의 경관 탐방은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다. '늙어서 남쪽으로 다닌 것을 기록하다'라는 71세의 유람기인 「질남록(耋南錄)」을 읽는다. 좁고 깊은 벼랑을 지나다 죽을 고비를 넘기는 아찔한 순간을 맞는다. 경관 탐구가 뭐길래 목숨마저 가벼이 여길까. 후회막심을 고백한다.


파근암에서 큰바람을 만나 만 길 벼랑을 지니는데. 발만 겨우 디딜 만한 좁은 길이 몇 리쯤이어서 거의 죽었다가 살아난 듯해 뒤돌아보니 오싹하였다. 돌이켜 생각해도 혼백이 어쩔어찔하니, 산을 구경하는 것이 무슨 일이기에 목숨을 이토록 가벼이 여기는가? 후회가 그치질 않으니 뒷이야기는 쓰지 않으린다. (…) 언제나 분주함이 멈추지 않았지만, 몸은 만족을 모르고 산이 남아 있으니 어느 때에 그만둘 수 있겠는가? 위험에 부닥쳐도 삼갈 줄을 모르고 기력도 따라주지를 않으니 산을 놀러 다니는 것을 끝내고 나서야 쉴 수 있을 것이다. (…) 그러나 뿌리 깊은 습관은 이미 깊어 마음에 매양 반짝거리니 평평한 들판을 갈 수 있다면 나갔고, 강가의 누대와 바닷가의 정자도 오를 수 있다면 올라갔다. … 만약에 다시금 미친 마음이 갑자기 생기게 되면 이 몸이 다시 어느 산 정상이나 어느 바다의 끝에 앉아 있을지는 알지 못한다.

—권섭, 「질남록(耋南錄)」 『삼천에 구백리 머나먼 여행길』, 문경시, 302~310쪽.


산수 경관을 노니는 게 대체 무슨 일이기에(遊山是何事) 몸과 목숨을 이처럼 가볍게 여기는가(而輕身命乃如此). 후회가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 보지 못한 산수 경관이 여전히 남아 있으니(山有餘), 그만둘 수 없겠다는 선언이다. 산수 경관을 모두 노닐어야(遊山訖) 쉴 수 있겠다(可休矣). 남원 근처 파근암에서 죽을 고비로 기세 꺾이는 것도 잠시, 지리산 기묘한 칠불암에 다시 오른다. 한번 마음먹으면 말릴 수 없는 이런 습성이 '뿌리 깊은 습관'인 '결습(結習)'이다.


결습이라는 말이 비범하다. 결(結)은 얽히고 맺혀 풀리지 않음이고, 습(習)은 날갯짓처럼 거듭 반복하여 몸에 배어버린 습관이다. 불교에서 전생(前生)부터 이어져 온 업보적 습성을 일컫는 이 단어를 권섭은 산수 탐구에 적용한다. 산수를 향한 발길이 전생부터의 인연처럼 끊어낼 수 없는 것이라는 고백이다. 이것은 자기 합리화가 아니다. 경관 탐방의 실천력을 철학적으로 정초하는 행위다. 조선의 선비가 '출처(出處)'의 갈림길에서 '처(處)'를 택할 때, 권섭은 그 '처'를 집에 앉아 있는 은둔이 아니라 산수 속을 부지런히 걸어 다니는 탐승(探勝)으로 실천한다. 산수 경관 전체를 다 유람해야 비로소 쉬겠다는 이 선언은, 사실상 평생 쉬지 않겠다는 다짐이나 다름없다.


이것이 동력이 되어 경관 탐방의 실천력으로 이어지는 것임을 본인이 잘 안다. 이처럼 권섭의 「유행록(遊行錄)」은 마치 현장에서 함께 경관을 조망하는 듯한 임장감(臨場感)을 지녔다. 경관 묘사의 서사를 쫀쫀하게 당겨 주며 놓치지 않게 하는 특징이 뚜렷하다. 「원유기」는 87세에 2,280리의 거리와 총 62곳을 113일에 걸쳐 탐방하였다. 「질남록」은 71세에 2,040리의 거리와 10곳을 25일에 걸쳐 탐방하였음을 기록에 남겼다. 그야말로 경관 탐방 기록의 대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나는 조금 다른 각도로 이 결습을 읽는다. 나는 지금 권섭이 남긴 기록 앞에 서서, 그 기록이 단순한 유람기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유행록」은 조선 최초의 본격적 경관학(景觀學) 문헌이다. 오늘날 경관생태학이나 경관계획에서 말하는 '경관 평가(landscape assessment)'가 보고서와 수치 데이터로 구현된다면, 권섭의 경관 평가는 발바닥과 숨결과 시와 산문으로 기록된다. 형식이 다를 뿐, 행위의 본질은 같다. 경관을 자기 몸으로 검증하는 것. 그 땅을 직접 밟고, 그 바람을 직접 맞고, 그 빛을 눈으로 받아내는 것. 권섭에게 결습은 현대 조경가에게 현장 답사가 지닌 의미와 정확히 겹친다.


경관 탐방의 첫 번째 덕목은 산수의 즐거움을 아는 것


권섭은 「유행록」에서 경관 탐방의 기본 덕목으로 산수의 즐거움을 아는 것이라 하였다. 어려움과 위험함을 꺼리지 않는 경관 탐방의 기본 마음가짐을 첫 번째 덕목으로 삼는다. 그리고 장소와 거리, 자연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경관 탐방의 객관적 사실을 바르게 전달한다. 지도를 보듯 경관 탐방을 함께 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또한 이름이 없는 승경지는 직접 이름을 짓는다. 가령 두류산(지리산) 유람의 김종직(1431~1492)과 비교한다. 김종직은 이름 없는 기이한 봉우리의 이름을 지어주라는 제안을 ‘고증한 근거가 없으면 믿지 않는다’라는 ‘무징불신(無徵不信)’을 들어 거절한다. 권섭은 지형을 관찰하고 느끼는 대로 이름을 짓는다.


아침에 절 앞 폭포에 잠시 머물고서는 고개를 하나 넘고 광암천을 따라 내려가서 종암의 한 구비를 보고 그 모양을 따라 ‘석문계’라고 이름 지었다.

-「권섭, 「동협록」 『삼천에 구백리 머나먼 여행길』, 문경시, 116쪽.


"朝日少臨寺前瀑布, 踰一嶺從廣岩川而下, 得鍾岩一曲, 因其形而名之, 曰石門溪." 그 모양을 따라(因其形而) 이름을 지었다(名之). 이것이 핵심이다. 선입견 없이 대상 그 자체를 바라보고, 그 형태가 스스로 이름을 부르게 한다. 경치가 뛰어난 곳을 만나면 반드시 정자와 누대를 세웠으며, 머무른 서재나 누각 또한 반드시 이름을 짓거나 기(記)를 써놓았다. "遇勝絶地界, 必置亭臺, 所居齋閣 亦必有名號題記." [출처: 『玉所稿』 七, 「散錄內篇」] 경관에 이름 짓기는 경관 학자에게 부여된 특출난 재능이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단순한 명칭 부여가 아니다. 이름을 짓는 행위는 그 공간을 언어의 세계로 불러들이는 작업이고, 인간의 기억과 문화 속에 그 경관을 등록시키는 행위다. 권섭이 이름을 붙이고 기를 쓰고 시를 짓는 일련의 행위는, 그가 지나간 모든 산수 경관을 조선의 문화 지형도 위에 새겨 넣는 일이었다. 오늘날 국가문화재 등재가 국가 자원의 공식 목록화라면, 권섭의 이름 짓기는 그보다 250년 앞선 민간 경관 자원의 목록화였다.


이름 하나의 무게 — 퇴계가 붙이고 권섭이 자기 정원으로 삼은 옥순봉


이 대목에서 옥순봉(玉筍峰)이라는 이름 자체를 다시 살펴야 한다. 나는 옥순봉이라는 이름이 품고 있는 시간의 무게를 생각한다. 이 이름은 권섭이 지은 것이 아니다.


옥순봉이라는 이름은 1548년 퇴계 이황이 단양군수로 부임 당시, 남한강에서 뱃놀이하다 이름을 지어달라는 동행 선비들의 청에 죽순(竹筍)을 닮았다고 하여 옥순봉(玉筍峰)이라 지었다.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이 「단양산수가유자속기(丹陽山水可遊者續記)」에서, 봉우리 깎아 세운 것이 높이가 천 백장이나 되는 대나무 순 같고, 그 빛이 푸르기도 하고 창백하다고 해서 직접 지은 이름이다.


퇴계가 이름을 붙이던 1548년, 그는 외직(外職)을 자청하여 단양군수(丹陽守)로 부임한 참이었다. 1548년 이황은 외직을 요청하여 단양군수로 부임하였으나, 곧 형이 충청감사가 되어 옴을 피해 봉임 전에 청하여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단양 체임 기간이 채 1년이 되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퇴계는 남한강을 배로 오르내리며 충주호 일대의 절경을 두루 살폈다. 그리고 이름 없는 바위 봉우리에 옥순(玉筍)이라는 두 글자를 새겼다. 이름 하나가 500년 가까이 그 봉우리를 지키고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대비가 생긴다. 퇴계는 공식적인 지명 부여자였고, 권섭은 그 이름 붙은 경관을 자기 정원 삼아 일생 드나든 향유자였다. 퇴계는 이름을 지어 떠났고, 권섭은 그 이름 속에 뿌리를 내렸다. 권섭은 구담봉과 옥순봉 사이에 강 건너 정자를 짓고 그 풍광을 완상(玩賞)하다가, 결국 그 혈처(穴處)에 산소를 마련하고 비문까지 직접 지었다. 이곳은 그에게 유람지가 아니라 생의 종착지였다. 정원이 무엇인가. 오래 드나들다가 결국 그 안에 자신을 묻는 곳이 정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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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조경가 ■시집 : 천년의 숲에 서 있었네 외 5권 ■한국정원문화콘텐츠연구소 ■월간 조경헤리티지 ■조경수목 문화콘텐츠(2019) ■시경으로 본 한국정원문화(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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