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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밀밀 Dec 12. 2024

케이팝 고인물이 본 '응원봉 시위'

[문제적 여자들] 케이팝 팬들이 응원봉 들고 여의도 가는 진짜 이유 

남편과 아이와 함께 삼겹살집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가게 안 커다란 TV에서는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집회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명이나물에 삼겹살을 싸서 입에 넣던 아이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어! 엄마! 저기 NCT 응원봉 있다!"


아이 말을 듣고 보니 탄핵 촉구 집회 현장 곳곳에 초록색 응원봉이 보였다. 네모나게 각진 망치처럼 생겼다고 해서 팬들 사이에서는 '믐뭔봄', '돈가스 망치'라고 불리는 응원봉이다.


아이돌보다 레고와 삼국지를 더 좋아하는 초등학생이 NCT 응원봉을 아는 이유는 엄마인 내가 NCT의 팬이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H.O.T 오빠들의 탕수육 맹세를 철석같이 믿었던 '클럽 H.O.T'는 애 엄마가 돼서 NCT를 좋아하는 '시즈니'(NCT 팬덤명)가 되었다. 1996년 캔디를 부른 H.O.T와 2022년 캔디를 부른 NCT DREAM까지, 어쩌다 보니 케이팝 20년을 관통하는 고인물로 살아가고 있다. 지난달에는 NCT DREAM 콘서트에 다녀왔고 1월에는 NCT 127 콘서트에 갈 예정이다.


덕후의 DNA를 가지고 태어나 H.O.T 이후에도 아이돌을 꾸준히 좋아했지만 콘서트에 갈 정도로 입덕한 것은 처음이었다. 공식 응원봉을 구입하면서 일단 5만 원에 가까운 가격에 깜짝 놀랐다. 팬덤 별로 색색의 풍선을 들던 시대는 끝났고 엔터사에서는 각 팬덤을 대표하는 공식 응원봉을 만들어 굿즈로 판매한다. 콘서트에 가면 중앙 제어를 통해 응원봉 색깔이 일제히 변하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사실 언론에 나온 응원봉은 NCT 팬덤 전체에서 활용할 수 있는 '구믐'이라고 불리는 구형 버전으로 현재는 공식 사이트에서 구입할 수 없다. 올해 SM은 NCT 각 유닛별로 다른 응원봉을 출시해 수입을 다각화했다. 쉽게 말해 돈을 더 벌겠다는 뜻이다. 나는 '뉴믐'을 안 사고 버티고 있었는데 익숙한 응원봉을 뉴스에서 보게 되다니. 고척돔에서 봤을 때만큼 발광력이 엄청났다. 남편에게 말했다.


"나도 응원봉 들고 나가야겠다."



케이팝 팬덤의 전투력


나의 최애, NCT 응원봉@홍밀밀


아이돌 팬덤의 세계에 들어선 지 만 2년. 나의 일상은 'X(구 트위터)'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X에는 덕질과 관련된 수많은 정보와 사진과 영상과 의견이 올라온다. 대통령의 비상계엄 발표 소식을 알게 된 것도 X를 통해서였다. 밤 10시 즈음 아이를 재우고 어둠 속에서 스마트폰을 열어 덕질을 하고 있는데 비상 계엄이 발표됐다는 뉴스가 피드에 올라왔다.


솔직히 처음엔 가짜 뉴스일 거라 생각했다. X는 정보의 용광로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신뢰할 수 없는 정보도 많은 곳이다. 안타깝게도 가짜 뉴스일 줄 알았던 비상계엄은 실제 상황이었고 하룻밤 사이 국민의 일상은 무너졌다. 지금까지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영문도 모른 채 오물을 뒤집어 쓴 기분이 들었다. 좀처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때부터였다. 아이돌 덕질용으로 최적화해 놓은 나의 타임라인이 계엄, 탄핵 관련 뉴스로 도배되기 시작한 것은. 4일 저녁부터는 응원봉을 들고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 현장에 나갔다는 인증샷이 속속 올라왔다. 아이돌 얼굴이 있었던 프로필 사진에는 '탄핵'이라는 글자가 적힌 빨간색, 파란색 머리띠가 등장했다.


대통령 탄핵안이 본회의에 상정된 7일 대규모 집회를 앞두고 케이팝 팬들의 선결제 릴레이가 이어졌다. 여의도에 있는 카페, 식당 등에 미리 일정 수량을 선결제 해두었으니 최애의 이름을 말하고 받아 가면 된다고 했다. X에는 '전국 응원봉 연대' 라는 계정이 생겼다. 계정 주인은 2016년 활동했던 응원봉 연대 깃발을 오마주해서 이 계정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당시 박근혜 퇴진을 요구했던 응원봉 연대 깃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덕후에게 덕질만 걱정할 자유를'.


응원봉 연대 계정에는 각기 모양과 색깔을 지닌 응원봉이 어둠을 밝히고 있는 사진이 올라와 있다. 그렇지 않은 아이돌도 있지만 대부분의 아이돌은 공개적으로 정치적 의견을 밝히지 않는 것이 불문율처럼 여겨진다. 탈정치화된 아이돌을 사랑하는 팬들이 정치적 사안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는 모습이라니. 처음에는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케이팝 팬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케이팝 팬들의 전투력이라면.


케이팝에는 온갖 비상식과 불합리가 끊이지 않는다. 지난 10월, 하이브에서 작성한 아이돌 품평 내부 보고서가 공개돼 크게 논란이 됐다. 오랜 케이팝 팬으로서 참담한 마음이 들었던 이유는 케이팝 산업의 선봉에 서 있는 회사에서 작성된 보고서에 아이돌이라는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아이돌은 언제든 대체 가능한 상품이고, 팬들은 역바이럴(음해성 여론 형성)로 무분별하게 흔들 수 있는 무지몽매한 대상이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이러한 인식을 비단 일부 엔터사만 공유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돌의 셀카 한 장, 소통 메시지 하나까지 돈벌이 수단이 된 케이팝에서는 팬들에 대한 존중을 찾아볼 수 없다. CD를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시대에 '랜덤 포카(포토카드) 끼워팔기'로 불필요한 앨범을 구매하게 만들고, 앨범 구매량 줄 세우기로 개최한 팬싸(팬사인회)에서는 몸수색 등 인권 유린이 일어나기도 한다. 콘서트 비용은 천정부지로 치솟아 한 장 가격이 20만 원에 달하고, 업자들이 끼어들어 플미(프리미엄)가 붙은 티켓을 되팔면서 티켓팅은 '피켓팅'이 되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약점이 되어 팬들은 인격 없는 ATM 취급을 받는다. 세계로 뻗어나가는 케이팝이라고 하지만 케이팝을 이루는 요소들은 전혀 선진적이지 못하다.


인권과 상식이 결여돼있는 산업에 맞서 케이팝 팬들은 아티스트와 팬덤의 권익을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꾸준히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왔다. SNS에 해시태그 총공(총공격)을 하고, 성명서를 내고, 불매운동, 트럭 시위를 하기도 한다. 뉴진스 팬덤은 국회까지 진출했다. 뉴진스 멤버 하니의 직장 내 괴롭힘 의혹과 관련해 고용노동부에 민원을 제기하는가 하면, 하이브 경영진을 국감 증인 명단에 추가해 달라는 내용의 팩스와 이메일을 대량 발송하며 국회의원들을 압박했다. 하니가 국감장에 설 수 있었던 배경에는 팬덤의 치밀하고 치열한 노력이 있었다.



사랑의 증거를 손에 쥐고서


내가 목격한 케이팝 팬들은 '오빠들'만 바라보면서 콘텐츠를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이들이 아니라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여자들이다. 나는 이러한 모든 행위들이 매우 '정치적'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꿈꾸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것, 혼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도 함께 행동할 수 있는 전략을 고민하는 것은 정치의 기본이다.


케이팝에서 쌓아온 전투력, 사녹(사전녹화)과 콘서트로 연마한 체력, 꺼지지 않는 발광력을 자랑하는 응원봉 이외에도 케이팝 팬들이 가지고 있는 강력한 무기가 있다. 바로 사랑의 힘이다. 'OO야, 살기 좋은 세상 만들어줄게'에 최애의 이름을 넣는 팬들은 이미 알고 있다. 연예인은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잘 살아가리라는걸, 정작 걱정해야 할 것은 내 인생이라는걸. 그럼에도 타인에 대한 사랑을 동력 삼아 최애와 내가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케이팝 팬들은 싸운다. 사랑의 증거인 응원봉을 손에 쥐고서.


H.O.T를 좋아했던 20년 전에 비해 케이팝 팬 문화는 진화했지만 여전히 팬들은 '빠순이'라는 멸칭으로 불린다. 집회장에서 응원봉을 든 팬들을 '정치에 무관심한 어린 여자들'이라고 규정짓고 기특해하는 태도는 아이돌 팬을 동등한 시민으로 보지 않는 시선에서 나왔을 것이다. 아이돌 팬덤에는 10대, 20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직장인 팬, 나처럼 엄마인 팬도 있다.


이들이 평소에 정치에 관심이 있었느냐 없었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문화를 포용할 수 있을 만큼 2024년의 광장이 유연해졌다는 것 아닐까. 아이돌 응원봉을 발견한 사람들은 야구 응원봉, 크리스마스 트리 조명 등 자신이 갖고 있는 반짝이는 것을 가지고 광장으로 나올 수 있게 됐다. 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은 아마도 아이의 것으로 추정되는 장난감 응원봉 인증샷을 올리기도 했다.


민중가요와 함께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 샤이니의 '링딩동', 에스파의 '위플래쉬'가 흘러나오는 여의도에는 사랑하는 것들을 내세운 사람들이 넘실댄다. 전국집에누워있기연합, 강아지발냄새연구회, 턱시도고양이사랑단, 겨울제철대방어연어학회… 국민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대통령과 국회의원이 국민의 소중한 일상을 앗아간 기막힌 상황 속에서서도 작고 귀여운 유쾌함을 사수하는 이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 싸움은 이길 수밖에 없겠다고. 결국 사랑이 어둠을 이길 것이다.


사실 지난주에 집회에 나가지 않았던 이유 중에는 '아이와 함께 갈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이 있었다. 이토록 다양한 개인을 포용할 수 있는 집회라면 어린이도 함께할 수 있을 것 같다. 탄핵안이 재상정되는 이번 주 토요일(14일)에는 나도 남편과 초등학생 아이의 손을 잡고 여의도에 나갈 예정이다. 최애의 애칭이 붙어 있던 반사 스티커 대신 새롭게 응꾸(응원봉 꾸미기)를 해야지. 아이에게도 좋아하는 것에 대한 깃발을 만들라고 해야겠다. 부디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상식을 바로 세울 수 있는 날이 됐으면 좋겠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시국 덕분에(?) 덕밍아웃을 하게 되었네요. 마음이 답답한 분들께 NCT DREAM의 'Hello Future'를 전합니다. 해찬아 살기 좋은 세상 만들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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