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의 마이크

내가 설 자리는 어딜까

by 마케터초인

슈퍼마케터 2장 마이크의 주인공



2.3 - 무대 위의 마이크








무대 뒤


장막 뒤 무대 위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조명은 아직 켜지지 않았고,
사회자의 멘트가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벽에 기대 서 있었다.

다리는 아직도 조금 떨렸다.

한 달 동안 내 다리는 내 다리가 아니었다.


연습은 끝났다.

이제 더 이상 도망칠 곳은 없다.


공연을 함께 준비한 각 팀의 주니어들이

나를 중심으로 모였다.


“인후님, 진짜 하는 거죠?”

“아, 진짜 하기 싫은데.”

“우리 팀 다 보는데 촬영도 한대요. 휴”

“이제 와서 안 할 순 없지.”

“하… 망하면 진짜…”


나는 웃으며 말했다.


“망하면 같이 망하죠.

잘 되면 같이 잘 되고요.

이왕 하는 거 같이 잘 돼 봐요.”


그 말에 누군가 웃었고,
누군가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자, 무대 위로 고!”


무대 저 멀리서
조대리가 보였다.


행사용 정장을 다득 차려입은 채.

우리 쪽을 보지 않고,

팀장님들과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Ready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 순서는 우리 회사의 자랑! 미래!

벌써 10년째 이어오고 있는 행사죠.

주니어 장기자랑입니다!”


박수가 나왔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손을 꽉 쥐었다.


그 순간, 연습실의 거울이 떠올랐다.


비상계단.
복도.
점심시간.
이어폰.


이것만 있으면 어디라도 연습의 무대였다.

그리고 회사 복도에서
나를 보던 김과장님의 얼굴.


특별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새겨졌던 모습



이건 단순히 잘 보이기 위한 무대가 아니었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회사에서 주어진 것으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마주했다는 증명의 시간이었다.





Go!


조명이 켜졌다.

순간 눈앞이 하얘졌다.

관객석은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맨 앞자리에

왕정아 대표님의 시선만큼은 느껴졌다.


음악이 시작됐다.

2PM의 <Heartbeat>

평소라면 눈치 보기 바빴을 새내기들이

이날만큼은 짐승이 되는 날.


심장박동 소리가 먼저 공간을 채웠다.

첫 박자.


몸이 먼저 움직였다.

발이 나갔고,
손이 올라갔고,
어깨가 박자를 탔다.


완벽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무너지지도 않았다.

연습은 나를 잘 추게 만든 게 아니라
멈추지 않게 만들어주었다.


결정적인 무대의 끝자락,

격정적인 에너지와 음악에

모두가 숨이 차오른 그 순간

글로벌팀의 막내가 무대 앞으로 나섰다.


셔츠를 걷어 올리며 드러나는

선명한 복근.


객석에서 터질 듯한 함성이 쏟아졌다.


그렇게 첫 번째 무대가 끝났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사이,

조명이 바뀌며 곧바로 다음 음악이 이어졌다.




노래는 <Hoot>.


앞무대가 남성들의 짐승 같은 무대였으니,

이 무대는 여성들의 판일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무대는 그렇게 시작이 된다.


각 파트의 포인트를 담아 화살을 쏘는 안무로

업무에 지친 회사사람들의 마음을 쏜다.


그리고 비장의 무기.

후렴구의 시작과 함께 갑자기 뛰어든 남성들.

의상은 짐승들이나 핑크빛 메이크업을 더했다.

남녀가 모두 함께하는 순간.


여성 아이돌 그룹의 음악을 남녀가 함께하는 것.

내가 처음 제안했던 아이디어였다.

춤 한번 추지 않았던 남자들의 여성 아이돌 군무.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 포인트였다.


처음엔 남성 멤버 모두가 질색했지만

지금의 반응을 보면 지난 일은 잊혀질 것 같다.


공연 중에 다른 멤버들의 얼굴이 보였고 눈이 마주쳤다.

프로젝트의 첫 시작.

맨 처음 나를 보며 짓는 눈빛과는 달랐다.


나를 믿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음악에 맡겨 다 함께 무대로 몸을 던졌다.


그 순간만큼은, 우리가 무대의 주인공이었다.





The end


음악이 끝났다.

한 달의 시간 동안 준비했던 두 무대를 모두 마쳤다.

순간 정적.


아주 짧은 정적.

그리고 함성이 쏟아진다.

생각보다 큰 소리였다.


기립박수.

사람들이 일어섰다.

나와 멤버들은 정지 자세로

숨을 몰아쉬며 무대를 계속 응시했다.


10, 9, 8, 7..

춤선생님의 미션.


"끝나고 10초 동안 움직이지 마세요."


후들거리는 다리, 땀으로 젖은 의상을 딛고

10초를 마저 채운다.

엔딩 임팩트를 위해.


사람들이 함성으로 가득 채웠다.

그 순간, 처음으로 ‘해냈다’라는 감각이 들었다.


짧지만 분명하게.






첫 번째 마이크


함성이 아직 가라앉지 않았을 때
사회자가 웃으며 말했다.


“와, 오늘 장기자랑 진짜 대박이었죠?

오늘 무대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오늘 자리를 이끌어주신 분이 누구죠?”


그 타이밍을 조대리는 놓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한 발을 내딛어 무대 앞으로 나왔다.


박수.


이미 마이크를 잡을 준비가 되었다는 표정이다.

조대리는 마이크를 잡았다.


“사실 이거, 기획부터 연습까지 꽤 오래 준비했습니다.

과정이 쉽진 않았지만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는 ‘시킨 사람’이었다.

그리고 회사에서는 그것만으로도
‘누군가의 공’이 된다.


잘 시키는 것도 일이니까.


조대리는 객석을 훑으며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완벽한 회사원의 미소였다.

나는 그 옆에서 박수를 쳤다.


그 순간, 무대 위 멤버들 중 몇 명이 나를 봤다.

짧은 시선이었다.

나는 그 눈빛의 뜻을 알았다.


왠지 모르게 복잡한 무언가가 속에서 올라왔다.

목구멍이 꽉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손 하나


“아, 근데요.”


객석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손을 들었다.

김과장님이었다.

연습할 때 지나가며 지켜보셨던.


“네. 말씀주시죠!”


객석이 술렁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김과장님을 향했다.

자리에 앉은 채로 말을 꺼냈다.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특히 인후 씨가 고생 많이 했던데요.”


그 말은 크지도 강한 톤도 아니었다.

담담하고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묘하게 잘 들렸다.


“한마디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순간 모두의 시선이 움직였다.

조대리로부터 김과장님에게,

그리고 나에게.

조대리가 잠깐 생각을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계산은 눈 깜빡일 사이에 끝났다.


“아, 맞아요.”


조대리가 웃었다.


“인후님이 고생이 많았죠.”


그리고 나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마치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던 것처럼.






마이크의 주인공


마이크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손에 땀이 찼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나는 잠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사이, 머릿속에서는

많은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알 수 없었던 불공평했던 순간들,

내가 혼자 남아 있던 서버실,

이 무대가 여기까지 오기까지의 시간들.


하지만 이건 그 감상을 말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잠깐 숨을 들이마셨다.

마음에서 목까지 올라온 말이 있었다.

이 자리를 실제로 준비한 사람이 누구인지.

하지만 나는 삼켰다.

지금은 그럴 타이밍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이 마이크는 내 마음을 드러내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를 마무리하는 시간이었다.

사회에서 배운 대로 자리에 맞는 가장 안전한 말을 꺼냈다.


마이크를 쥔 손이 떨렸다.


“부족한 무대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자리를 함께해 주신 각 팀의 멤버분들,

그리고 좋은 시작을 만들어주신 조대리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지금의 나는 그 말이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다시 박수가 터졌다.

객석에서 누군가 말했다.


“인후 씨! 잘했어!!"


그 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내 이름이 분명히 들렸다.






무대 가장자리로 빠진
조대리는 박수를 치고 있었다.

박자의 시작도, 끝도 정확했다.


너무 정확해서 연습한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타이밍이 완벽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이 사람은 누군가의 무대로

자기 자신을 빛내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그리고 그게 이 회사에서

얼마나 강력한 능력인지도.

이해는 됐다.


왜 이 사람이 여기까지 왔는지.

왜 항상 딱 안전한 말만 했는지.

왜 박수를 받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지.


하지만 동시에 아주 조용한 거부감이 생겼다.


저 방식이 옳다거나,

틀렸다거나의 문제가 아니라.

나는 저 방식으로는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


아직은 어떤 사람이 될지는 몰라도,

적어도 저 사람의 방식으로

잘 되는 사람이 되지는 않겠다는 것.


세상에 모든 무대의 주인공들이

꼭 마이크의 주인공은 아닐 수 있다.


내가 어디로 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어디까지는 가지 말아야 할지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착각의 밤


연말 행사를 마치고 전 직원이 뒤풀이에 모였다.


술잔이 오가고 사람들의 표정이 풀렸다.

회사라는 이름이 잠시 느슨해진 부산의 밤이었다.


“인후 씨.”


잠깐 바람을 쐬러 나온 사이,

누군가 내 어깨를 가볍게 쳤다.


김과장님이었다.

“고생 많았어요. 그거요. 아무나 못 해요.

그리고 그거 알아요?

10년 전에 인후님 한 거. 그 역할이 나였어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왜 나에게 그렇게 해주셨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때도 얼마나 창피했는지.

근데 그때가 진짜 시작이었던 것 같아."


김과장님은 모두가 모인 저 안쪽을 한 번 흘깃 봤다.

조대리가 있는 쪽이었다.


“회사에 말이야,

저렇게 잘 던지는 애들도 필요해요.”


잠깐의 공백.

말끝을 흐리는 습관처럼

그는 바로 이어 말했다.


“근데 꼭 그게 정답은 아니더라고.

잘 던지다가 다치는 경우도 많고요.”


그 말은 지금 나에게

당장 결론을 내리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처럼 들렸다.


‘회사에는 김과장님 같은 사람도 있구나.

그렇다면, 나 같은 사람이 설 자리가

정말 없기만 한 건 아닐지도.’


그렇게 나는 믿고 싶어졌다.





같은 테이블, 다른 세계


어쩌다 보니 술자리가 합쳐졌다.

같은 테이블의 조대리가 잔을 들고 말했다.


“회사라는 게 말이야…
열심히만 한다고 되는 데가 아니야.”


그 말 한마디로 분위기는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


“인후야. 이럴 때일수록 더 조심해야 돼.

티 나게 하지 말라고. 눈치 살피고.”


나는 어느새 굳은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잘못하다가 크게 다친다.”


김과장이 툭 치며 편한 말로 꺼냈다.


“술자리에서까지 너무 그러지 마.”


조대리는 웃었다.


“과장님은 또 착한 척. 잘 모르면서."

김과장은 더 말하지 않았다.

대신 나를 봤다.


“화장실 좀.”

조대리가 자리를 비웠다.


김과장님은 괜찮으신 걸까.


“오늘 조대리님이 조금 피곤하신가 봐요.”

“응? 괜찮아. 사실 조대리랑 나 동갑이거든.”

“정말요?”

“사석에서는 괜찮아. 공석만 올라가면,

각자 자기 역할을 하느라 그렇지.”


김과장님이 잔을 들었다.


“인후님.”

"네."

“회사 오래 다니다 보면,

다들 한 번쯤은 자기 얼굴이 회사 얼굴이 돼.”


김과장님은 노가리를 뜯으며 말을 이어갔다.


“근데 말이야, 그게 다 맞는 게 아닐 수 있거든.”


잠깐의 침묵.


“너무 빨리 그 얼굴로 갈 필요는 없어.

자기만의 얼굴이 필요해.”


나의 지난 시간을 알고 있다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떤 삶을 살아오신 걸까.


그 말은 짧았지만 무거웠다.





이상한 존재


그날의 술자리는 길어졌다.

2차. 3차. 4차.

김과장님이 따로 데리고 나온 자리로 이어졌다.
취기가 오를 수록 말이 솔직해졌다.


“나중에 같이 뭐 해보자.”
“너 같은 애는 오래 봐야 돼.”
“너무 회사만 보지 마.”


이제껏 사회라는 곳에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들이었다.

칭찬인지, 위로인지, 그냥 취중농담인지.

굳이 구분하고 싶진 않았다.


그냥 믿고 싶었다.

나는 이상한 존재가 아니었다.

다만 조금 다른 존재였던 것이다.

적어도 오늘 밤만큼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함께 숙소로 돌아오는 길,
부산의 밤바람이 차가웠다.


나는 잠깐 멈춰 섰다.

오늘처음으로 무대에 서서 박수를 받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쁜 마음보다는 물음표가 더 많이 남아 있다.


나는 아직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했다.


다만 모두가 가는 길이

꼭 정답이 아닐 수는 있다는 것.


그 한 가지만큼은, 오늘 조금 더 알게 되었다.





그 해 겨울


그 해 겨울은 유독 추웠다.

연말행사 후 일주일이 지나고

회사 안에서 이상한 말이 돌기 시작했다.


“우리 계열사 싹 다 하나로 합쳐진대.”

“조직 싹 다 바뀐다더라.”

“자리도 많이 없어진다던데?”


누군가는 그걸 ‘기회’라고 불렀고,

누군가는 ‘위기’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들이 왜 이렇게 피부에 닿지 않는지 이상했다.

아무 존재가 아니어서 그랬던 걸까.


기회든 위기든, 그건 늘

선택할 수 있는 사람들 이야기다.


누가 남고,

누가 옮기고,

누가 사라질지.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는데,

이미 세상은 누군가를 밀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해 서버실의 겨울은 유독 차가웠다.

사람이 아니라 기계가 기준이 되는 온도.


이 회사는 늘 그렇게 움직였다.


'회사가 변하면 나는 어떻게 될까?'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여기서 나는, 필요한 쪽일까.

아니면 조용히 사라지게 되는 쪽일까.’


답은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제부터의 시간은

누군가의 선택을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라,

내가 어디에 서게 될지 바라보고

버텨내야 하는 시간이라는 것.


나에게는 위기와 기회, 어떤 것이 다가오고 있는 걸까.




(3.1 - 회사가 사라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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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