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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황 Aug 10. 2021

"그래, 문제 오류를 투고하자!"

수능 출제오류 행정소송 분투기2

나는 당시 「월간 두뇌보완계획」(이하 「월간 두보계」)에 원고를 매달 투고하고 있었다. 월간 두보계는 『두뇌보완계획100』을 쓴 김명석 박사님이 발행하는 온라인 매거진이다. 

_출처: https://ithink.kr/57


참고로 『두뇌보완계획100』은 최근 5년 간 논리와 비판 사고 분야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고, 저자 김명석 박사님은 15년 간 사고능력 문제를 출제한 국내 최고의 시험 전문가다. 어찌어찌 인연이 닿아서 내가 오르비클래스에서 『두뇌보완계획100』을 강의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 「월간 두보계」에 문제 오류를 투고하자!"


2021수능 정치와 법 5번 이의제기를 진지하게 검토하고 받아줄 곳은 월간 두보계밖에 없었다. 물론 유명한 잡지도 아니고, 내 주장이 실린다고 어떤 법적 효력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지만, 공개적으로 출제오류를 기록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때 투고고 뭐고 그냥 넘어갔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행정소송할 생각도 안 했을 텐데...




원고를 쓰기 위해 먼저 수수께끼 문장을 수집했다. 뒤에서 자세히 밝히겠지만, 이의제기의 핵심은 수수께끼 문장의 해석방법이다. 수수께끼 문장이란 말 그대로 '어떤 사물에 대하여 바로 말하지 아니하고 빗대어 말하여 알아맞히는 놀이'(표준국어대사전) 문장이다. 이는 수능 사회탐구, 과학탐구 문항에 곧잘 쓰이며, 공무원 시험에서도 발견된다.


사흘 밤낮으로 전개년 기출문제를 샅샅이 뒤져보니, 수능에는 크게 세 종류의 수수께끼 문장이 쓰이고 있었다.


ㄱ. a와 b는 각각 X와 Y 중 하나이다.

ㄴ. a와 b 중 하나는 X이고, 다른 하나는 Y이다.

ㄷ. a와 b는 X와 Y를 순서 없이 나타낸 것이다.


ㄱ~ㄷ은 a가 뭔지, b가 뭔지 맞춰보라는 수수께끼 문장인데, 미묘하게 차이가 있다. ㄱ을 ㄴ이나 ㄷ과 같은 뜻으로 이해할지, 다르게 이해할지가 출제오류를 판가름한다.


수능 정답 확정 발표 사흘 뒤, 월간 두보계에 투고한 메일




아래에 소개하는 내용은 당시 투고한 내용 일부를 수정한 것이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


ㄱ. a와 b는 각각 X와 Y 중 하나이다.

ㄱ은 a와 b가 모두 X이거나, 모두 Y인 경우를 허용한다. 예를 들어, "1심과 2심은 각각 원고의 승소나 패소 중 하나이다"는 1심과 2심 모두 원고가 승소하는 경우를 배제하지 않는다. 상식적으로도 문법적으로도 당연한 해석방식이다.


이처럼 ㄱ은 a, b와 X, Y가 일대일 대응되는 문장이 아니므로, 다음과 같이 확장되어 쓰일 수 있다.


[2021학년도 9월 모의평가 물리I 5번]

ㄱ-1. A, B, C는 각각 도체반도체 중 하나이다. 

(실제 문항에서 A와 C는 도체, B는 반도체였다.)


[2018학년도 6월 모의평가 화학II 13번]

ㄱ-2. (가)(나)의 결정 구조는 각각 단순 입방 구조, 체심 입방 구조, 면심 입방 구조 중 하나이다. 

(실제 문항에서 (가)는 단순 입방 구조, (나)는 체심 입방 구조였다.)




ㄴ. a와 b 중 하나는 X이고, 다른 하나는 Y이다.

ㄴ은 a와 b가 모두 X이거나, 모두 Y인 경우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것이 ㄱ과 가장 큰 차이점이다. 예를 들어, a가 Y로 확인되었다고 하자. 이때 ㄴ 아래에서는 b가 X라고 결론내릴 수 있다. 반면 ㄱ 아래에서는, b가 무엇인지 여전히 알 수 없다. b는 X일 수도 있고 Y일 수도 있다.


기출 예문은 다음과 같다.


[2016학년도 수능 지구과학II 6번]

ㄴ-1. (가)와 (나) 중 하나는 퀘이사이고 다른 하나는 세이퍼트 은하이다.


[2015학년도 수능 지구과학II 13번]

ㄴ-2. A와 B 두 광물 중 하나는 각섬석이고, 다른 하나는 장석이다.


참고로 ㄴ은 다음과 같이 확장되어 쓰일 수도 있다.


[2022학년도 6월 모의평가 생명과학II 17번]

ㄴ-3. A는 ㉠~㉢ 중 하나가, B는 그 나머지 중 하나가 결실된 돌연변이이다.

(실제 문항에서 A는 ㉡이 결실되었고, B는 ㉠이 결실되었다.)




ㄷ. a와 b는 X와 Y를 순서 없이 나타낸 것이다.

ㄷ은 a와 b가 모두 X이거나, 모두 Y인 경우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것이 ㄱ과 가장 큰 차이점이다. 


[2015 수능 물리1 12번]

ㄷ-1. X와 Y는 p형 반도체와 n형 반도체를 순서 없이 나타낸 것이다.


[2020 수능 생명과학I 6번]

ㄷ-2. ㉠과 ㉡은 결핵의 병원체와 후천성 면역 결핍 증후군(AIDS)의 병원체를 순서 없이 나타낸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ㄷ은 ㄴ과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는 듯하다. 하지만 확장형을 살펴보면 차이가 드러난다.


[2021학년도 수능 생명과학II 4번]

ㄷ-3. A~C는 기관, 기관계, 조직을 순서 없이 나타낸 것이고, (가)~(다)는 A~C를 순서 없이 나타낸 것이다.


ㄷ에는 앞대상들과 뒷대상들이 일대일 대응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내포되어 있다. 반면, ㄴ은 ㄴ-3에서 보듯 그렇지는 않다. 단지 대상들이 두 개씩일 때 ㄴ에서는 결과적으로 일대일 대응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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