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개인적인 기록의 시작
처음으로 내 삶을 기록한다는 개념이 생긴 날은 학교에서 그림일기를 그리기 시작한 날이었다.
선생님은 제목과 날짜와 날씨를 적는 선과 그림을 그리는 커다란 네모와 글씨를 적는 작은 네모가 있는 노트를 펼치고 그 안에 나에게 있었던 일을 기록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셨다. 그림에는 딱히 소질이 없었고 글씨도 삐뚤빼뚤이었던 나는 이 일에 커다란 흥미를 느끼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는 끊임없이 ‘일기’라는 기록을 해서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학기 중에도, 방학 숙제 목록에도 그놈의 ‘일기’는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그나마 그림을 그릴 필요는 없어서 부담이 덜어진 정도만 있을 뿐.
특히 방학일기의 경우 개학 전전날쯤부터 갑자기 지난 세월을 소환해내기 위해 엄빠를 괴롭혔다.
“엄마! 나 이 날 뭐 했어? 아빠는 혹시 기억 나?”
남매의 방학일기와 탐구생활 및 숙제를 돕느라 덩달아 눈썹 휘날리게 바빠진 엄마 아빠는 늘 우리에게 당부했다.
“다음 방학 때는 제발 밀리지 말고 쓰자!”
그러고 보면 진짜 시골에 사는 이모까지 소환되어서 한꺼번에 방학숙제 소탕작전에 동원됐던 기억이 난다.
그토록 뭘 쓰는 일에 관심이 없던 내가 변하기 시작한 건 한 선생님이 일기에 코멘트를 해주시면서부터다.
늘 보던 식상한 “참 잘했어요” 도장 말고 일기의 내용에 따라 A, A+, A-, B, C까지 등급을 나눠서 점수를 매기고 내용을 읽은 뒤 몇 줄 소감을 남겨주신 것.
그때부터 일기를 쓰는 데 재미가 들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해 방학에는 난생 처음으로 우리나라가 아닌 외국 여행으로 일본 도쿄에 가게 됐다.
문화교류의 일환으로 갔던 거라 난생 처음으로 긴 시간 가족과 떨어져 홀로 낯선 일본의 가족의 일원으로 생활하는 시간
처음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모든 것이 다 낯설고 새로웠고 너무나도 강렬했다.
아직 어린이 신분이었지만 이 모든 것을 기록하지 않으면 잊혀질까봐 두려운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일본에 머무는 3주 동안 매일 밤 잠들기 전 노트를 펼치고 일기를 썼다.
일기를 써야 하는 노트를 기왕이면 귀엽고 예쁜 것으로 쓰고 싶다는 욕심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보이기만 하면 그 집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산리오로 들어가서 노트 같은 문구류 쇼핑에 심취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이야 한국에서 못 구할 것이 없지만 그때는 산리오 같은 아기자기 귀엽고 앙증맞은 문구류는 찾기 힘든 시절이었다.
당시 한국은 아직 염색 같은 것이 일반화되지 않았던 보수적인 시절이기도 해서 일본의 젊은 언니 오빠들이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는 걸 그렇게 겉모습이라도 서양인이 되고 싶어 하는가 보다고 분석하기도 했고, 맥도날드 안에서 담배 피우는 아저씨들도 모자라 언니들까지 있는 모습에 화들짝 놀라기도 했던 아주 순수한 바른생활 유교 어린이가 바로 나였다.
단 하루도 빠지지 않았을 리는 없지만 그렇게 나는 일기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특히 여행을 떠나서는 아무리 힘들어도 꾸벅꾸벅 졸면서라도 그날의 일을 갈무리해서 적어둔 뒤 잠들었다.
어쩌면 여행이라는 하나의 내 삶의 부분이 중요해지면 중요해질수록 기록이라는 것도 더욱 중요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성인이 되자마자 한 일은 나를 위해 카메라를 장만하는 일이었고 밥 먹는 시간과 돈을 아껴가며 필름을 사서 구석구석 누비며 사진을 찍는 데 열정을 쏟기도 했다.
사진도 내 삶의 장면 장면을 포착하서 기록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매체였으니까.
텍스트는 있었던 일과 그에 관한 나의 감정이나 생각을 기록한 거라면 사진은 장면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는 기록이었다.
온라인이라는 가상의 공간이 생겨나자 물리적인 기록보다 간편하다는 점과 타인과 소통의 용이성이 결합해서 사진과 글을 결합한 기록들을 남기기 시작한다.
결국 나중에는 여기에 영상이 추가되고......더 이상의 말은 아끼겠다.
지금 이렇게 살펴보니 내 기록의 기원은 잊혀짐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내가 보고 듣고 만지고 느낀 것들이 잊혀질까봐 기록으로 남기지 않을 수 없었던 거다.
떨리던 순간, 형언할 수 없는 슬픔, 어디에도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 너무 작지만 내겐 아주 소중한 기쁨의 이야기.....
다 기억하고 싶었다.
나중에 읽고 후회할 이야기조차 다 기록으로 남겨서 잊고 싶지 않았다.
나의 의무는 훗날 다시 꺼냈을 때 최대한 생생하게 복기할 수 있도록 그에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기록하는 것.
기록은 나날이 중요해져서 어떤 때는 기록을 위해 뭔가 일을 도모할 때도 왕왕 생겨났다.
예를 들어 눈 내릴 때 차 마시는 모습을 찍고 싶어서 눈 내리는 날을 기다리는 한편 어디에서 어떻게 어떤 차를 마실지 고민하는 그런 것.
https://youtu.be/PVe7N9q9-OI?si=_7f96gd9BHqqycUk
내 삶의 궤적이 어떤 기록으로 남을까.
잘 모르겠다.
아마도 지금 살고 있는 대로 남겨지겠지.
다만 그동안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간의 내 기록들을 다 꺼내놓았다는 것이다.
사실 전에는 ‘기록함’ 그 행위 자체에 몰두했기 때문에 이전의 기록을 되돌려보는 일은 책을 집필하기 위해서 같은 특수 상황이 아니라면 잘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마음을 바꿨다.
그간의 기록을 살피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아야 할 것 같다는 기분이 나를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내가 온 마음을 다해 간절하게 원하는 삶의 기록을 남길 수 있기에.
몇 번의 이사를 다니면서도 한 번도 열지 않았던 먼지 쌓인 35년 동안 쓴 일기장이 든 상자를 열고 그 안에 잠들었던 지극히 개인적인 사소한 나의 기록들을 꺼내어 펼쳐보았다.
꽤 많았다. 상자에 미처 담지 못했던 많은 일기장이 여전히 책장 곳곳에 숨어 있었고 중학교 때부터 해온 온라인 기록은 전혀 카운팅되지 않았는데도 정말 굽이굽이 기록이 펼쳐지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https://youtu.be/lOrq_IFmM3s?si=aiXuw2gMhLuicDap
누구나 자신의 기록에 대한 기원이 있을 것이다.
그게 무엇이든 우리는 기록함으로써 기억하고 그걸 바탕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제발 부탁하건대 ‘나도 해보고 싶긴 한데 이미 글렀네’ 같은 생각은 하지 마시길.
지금 당장 시작해도 늦지 않은 일임이 분명하므로!
약간의 조언을 드리자면 처음부터 일기장 마련해서 정자세로 앉아 쓰려고 하지 마시길.
보기만 해도 기분 좋은 작은 수첩을 사서 거기에 한 줄씩 오늘의 이야기를 적어보고 그렇게 한 자신을 격하게 칭찬하며 잠들어 보시길.
매일 앞으로 나아가다 어느 날 문득 뒤 돌아봤을 때 그렇게 사부작사부작 쌓인 당신의 기록으로 뿌듯하고 가슴 벅찬 날을 맞이하길 기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