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noopyholic Feb 10. 2024

당신의 능력은 잘 진열되어 있습니까?

육체노동의 나날들_21

진열이라 함은 상품이 팔려나갈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전시라고 볼 수 있다.

일반 마트나 백화점 같은 물리적으로 고객들이 방문해서 직접 물건을 골라야 하는 상점에서는 어떤 미장센으로 상품을 전시하는지가 하나의 중요한 요소일 수 있다.

하지만 손님을 만나지 않고 앱이나 웹으로만 물건을 파는 경우에는 온라인 상에 있는 사진의 화질이나 컴포지션이 손님의 마음을 움직일지 말지 결정하게 된다.

물론 내 일터는 ‘이미 아는’ 물건을 파는 마트라서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직접 물건을 다루는 매장에서는 모든 물건에 있는 제조일과 유통기한을 고려해서 빠르게 그 마감일이 다가오는 것부터 내보낼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회사에서 물류비를 들여서 이 일을 하고 있고, 유통기한을 지난 물건들은 폐기되어야 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회사의 손실을 뜻하는 것이니까.

일하는 사람으로써는 입고량이 압도적으로 많아서 너무 바쁠 때는 특히 공산품의 경우 일단 매대에 욱여 넣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리고 회사는 이런 걸 이미 다 알기라도 한다는 듯 바쁨의 쓰나미가 지나가고 생긴 주문과 주문의 틈사이에서 유통기한을 조사하라고 시킨다.

언제나 그렇듯 쫓고 쫓기는 관계 같은....톰과 제리 같은.....

회사는 일을 시키고 싶고 직원은 꼼수를 부리고 싶다.

.

.

.

.

.

.

그러고 보면 백화점의 창고와 마트의 진열대가 통합된 곳이 우리 매장이 아니었나 싶다.

.

.

.

.

.

.

지금도 기억나는 건 입고와 진열 물량이 너무 많아서 머리를 비우고 기계처럼 일만 하고 났는데 첫 주문 전에도 진열이 끝나지 않는 날들이다.

하필이면 그런 날은 주문도 많다.

아니지, 인공지능이 정확하게 주문이 많을 것을 예측하고 그토록 많은 물량을 보낸 것일 테니......

허물처럼 벗겨저 나뒹구는 박스와 비닐과 떼어진 테이프들의 잔해를 뛰어 넘고 요리조리 피하며 주문을 쳐내야 할 때의 당혹감.

쳐내도 쳐내도 쌓이는 모니터의 주문번호들과 뛰어다니며 소리 지르는 크루들 사이에서 이곳이 지옥인가 생각하게 된다.

내가 이럴려고 인생을 사나 싶어 슬쩍 자기 연민이 끼어들기도 하는 시간.

.

.

.

.

.

.

문득 지금 나의 진열 상태는 어떤가 생각해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의 능력을 팔아야 하는데 내 능력은 과연 팔릴 수 있는 상태로 매대 위에 잘 올라가 있는지를.

매거진의 이전글 그럼 CL은 혹시 Close?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