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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공일북클럽 Dec 02. 2020

머리카락

“내방은 내가 알아서 해요, 들어가지 말아요!”


부탁이라기보다 명령에 가까운 둘째 딸의 단호한 말은 당사자인 남편뿐만 아니라 나까지 흠칫하게 만든다. 첫째 딸은 그런 말조차 불필요하다는 듯이 자신의 영역이 침범당하는 걸 온몸으로 거부하고 있음을 직접적으로 느끼게 하는 편이다. 


밀대와 마른걸레, 진공청소기를 옆에 끼고 사는 남편은 수시로 바닥먼지 제거, 특히 두 딸과 나, 세 여자의 머리카락을 제거한다. 남편은 머리카락이 없다. 탈모 유전자가 없다고 큰소리쳤지만 중년이 되자 이마 양쪽부터 머리가 빠지기 시작했다. 뱃살과 주름, 탈모의 조합이 제 나이보다 훨씬 더 들어 보인다는 말에 콧방귀도 안 뀌던 그가 어느 날 마트 계산대에서 부딪힌 대여섯 살의 아이에게서 할아버지 소리를 들은 이후 거울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다행히 두상이 예쁘니 머리를 다 밀어버리는 게 어떠냐는 우리의 권유를 받아들인 후 지금은 비니 스타일로 젊어 보인다는 칭찬까지 듣고 있다. 아무튼, 머리카락이 없는 그가 머리카락을 제거하기 위해 어휴, 세상에, 등의 감탄사를 웅얼거리며 소파나 침대 밑, 의자 아래, 방문 뒤, 가구와 가구 사이의 틈, 여기저기를 밀대로 훑고 다닌다. 흡착력이 강한 마른걸레에 시커멓게 뭉쳐진 먼지와 머리카락을 다시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인 후 청소기의 먼지 통을 분리해서 쓰레기통에 탈탈 털어놓는다. 그 뿌듯함과 희열의 작업을 시도 때도 없이 하는데 머리카락이 무더기로 있을 딸들의 방문 앞, 그 금기의 선을 넘지 못하고 번번이 돌아서야 하는 밀대의 안타까움을 난 보고도 못 본 척하고 있다.


미용실만 가면 자지러지게 우는 첫째 딸의 머리카락을 첫 돌이 안 될 무렵부터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머리통보다 더 큰 가위로 잘라 준 것도, 눈에 띌 때마다 아이가 좋아하는 색깔과 모양의 머리띠며 리본을 사 모은 것도, 머릿결 좋아지라고 브러시로 마사지하듯 빗겨준 것도 다 남편이었다. 그런 면에서 무신경한 내가 아니라.

세상 둘도 없는 아빠와 딸들, 그 부녀 사이가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아이들의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인 것 같다. 예고도 없이 아빠는 딸들과의 스킨십을 단호히 거부당했고 퇴근길에 사 들고 오는 선물들은 퇴짜를 맞았으며 그들이 열광해 마지않는 아이돌들에게 우선순위를 내주어야 했다. 몇 번의 윽박지름이 다정한 사과의 말들, 맛있는 외식, 여행으로 무마될 때도 있었지만, 유효기간은 짧았다. 딸들은 8기통 스포츠카로 저만치 쌩쌩 달려가는데, 아빠는 바람 빠진 줄도 모른 채 죽어라고 자전거 바퀴를 굴리며 쫓아가는 셈이었다. 딸들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사이 애꿎은 방문만 부서지고, 보이지 않는 벽은 차곡차곡 쌓여 올라갔다.


안타까웠다. 


딸들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아빠의 마음을 몰라주는 아이들이 너무한 거 아닌가 싶어서 남편을 편들 때도 있었고, 가부장의 틀이 여전히 작동할 거라 착각하는 남편이 한심해서 딸들 편에 서서 공격하기도 했다. 바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자신의 방식이 여전히 통하는 비좁은 사회 속에서만 지내던 남편에 비해 상대적으로 딸들의 성장 과정을 공감하며 함께 성장해온 나는 좀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설픈 중재는 늘 거대한 실패의 부메랑으로 되돌아왔을 뿐이고 눈감고 외면하는 비겁함과 눈물 짜는 불면의 밤만 늘어났을 뿐이었다.


수직으로 치솟는 y축과 수평으로 한없이 뻗는 x축처럼 도저히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관계는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때로는 충돌하고, 아파하고, 물러서고, 비켜주면서 만나게 되는 좌표들, 그리고 그 점들을 잇는 선은 서로의 축에 조금씩 다가가기도 물러서기도 한다. 


여전히 머리가 긴 여자 셋은 집 안 구석구석 머리카락을 흩날릴 테고, 머리카락이 없는 한 명의 남자는 밀대의 회전실력을 뽐내며 머리카락들을 채집하겠지만, 금기의 선 또한 여전히 지켜질 것이다. 안타까움이나 원망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예의와 존중의 마음으로 그어진 선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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