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단상#1
바르셀로나, 람블라스 거리를 걷고 있었다. 꽤 늦은 시간까지 거리 곳곳과 음식점마다 사람이 북적이는 곳인데 출근을 앞둔 일요일 밤 이어서일까, 거리는 한산하고 가게와 음식점들은 거의 문을 닫았거나 닫고 있었다. 월요일부터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서인지 어느새 어깨가 움츠러드는 추위가 느껴져 숙소에 두고 나온 무스탕이 자꾸 생각났다. 11월의 바르셀로나는 서울의 봄, 가을, 겨울 날씨가 다 섞여있어서 좀 혼란스럽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를 바르셀로나의 밤거리를 조금은 더 눈에 담고 싶어 숙소로 돌아가는 발길을 잡아둔 채, 따뜻한 차라도 한잔 마실까 해서 카페를 찾아 거리를 헤매던 중에 그를 보았다. 화려한 장식의 르네상스 시대 건물들이 나란히 들어서 있는 그곳, 한 닫힌 상점 문 앞에 다리를 길게 뻗고 한쪽 손은 머리를 받치고 한쪽 손은 책을 들고 독서에 몰입해 있던 그를. 스치듯 지나가며 그를 보았고 되돌아볼 용기가 없어서 다시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그에 대한 인상은 지금까지 또렷하게 남아있다. 노숙자임이 분명한 차림새에 동전 깡통을 앞에 놔두었지만 독서에 몰입된 깊고 빛나던 그의 눈빛. 노란 가로등이 켜진 어두운 거리에 행인들은 갑자기 떨어진 기온 탓에 옷깃을 여민 채 바쁜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그 혼자만 마치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지중해변에 누워 있는 것처럼 그곳에 있었다. 전신을 릴랙스 한 채 쭉 펴고 태양 아래 한가로이 책을 읽던 휴양지의 사람들처럼.
그 사람의 사정은 고려하지 않은 채 내 글에 낭만적인 레퍼런스로 그를 소환하는 건 아닌지 우려하고 있지만, 그의 눈빛과 내 기억 속에 남은 강렬한 인상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순간, 그 눈빛이 주는 묘한 위로를 언젠가 떠올리게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했다.
버거운 일상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는 해방감만큼 낯선 도시에 이방인으로 서있는 두려움과 불안감도 컸다. 물론 서울에 있을 때와 다른 형태의 불안함이지만. 주거와 배고픔에 대한 공포와 무관하게 독서에 몰입된 그의 눈빛을 본 순간 이상하게도 마음속으로 고요한 평화가 찾아왔다. 어둠, 가로등 불빛, 차가운 바람, 자동차 경적소리, 사람들의 빠른 발걸음, 시위대와 경찰,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관광객들 그 순간 모든 소리를 음소거한 ‘책 읽는 사람’의 모습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