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공일북클럽 Dec 16. 2021

고야의 개

여행의 단상 #8


나 대신 고야의 ‘  보고  .


낯선 도시를 방문할 기회가 있을 때, 미술관이 있는지 검색해서 꼭 들르는 편이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그마저도 내켜야 했기 때문에 ‘반드시’ 방문해야 할 곳이라는 말을 들어도 과감히 패스하곤 했다. 여행 중인 어느 날 선배의 이런 메시지를 받고 나서야 비로소 꼭 들러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고야의 ‘개’라니. 알아보니 프라도 미술관에 있었다. 한 가지 목적이 생기니 없던 의욕이 생겼고, 온전한 하루를 미술관에서만 보낼 생각에 갑자기 즐거워지기까지 했다. 평소에는 미리 예약해야 할 정도로 붐비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관이지만 아침에 일어나 느긋하게 준비를 하고 지하철을 타고 도착해 매표소에서 쉽게 표를 구입할 수 있었다. 미술관 앞에 있는 고야의 동상을 카메라에 담고 한산한 미술관 입구로 들어서서 검색대를 통과해 드디어 입장했다.


안내서의 미술관 지도에는 고야, 벨라스케스, 엘 그레코의 섹션이 따로 마련되어 있어서 많이 헤매지 않아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소설 <클로디아의 비밀> 속 주인공처럼  미술관이라는 미로 속에 갇혀서 하루 종일 길을 잃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흔치 않은 경험이 될 테니까. 중세시대에 그려진 커다란 화폭에 담긴 그림들부터 천천히 보면서 이 방 저 방을 그렇게 훑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개’와 우연히 마주치길 기대하면서.


그린, 퍼플, 그레이, 블루, 레드, 브라운의, 페인트 색상표에서 나를 사로잡았던 색들이 칠해져 있는 벽들 위에 전시되어 있는 그림들. 중세시대 종교화들과 르네상스의 그림들, 풍경화와 정물화, 그리고 초상화들. 색과 빛의 황홀함에 젖어 관람용 의자에 앉아 멍하니 한참을 앉아 있기도 했다. 다른 관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기념품 숍의 화집과 프린트된 그림들을 구경하다가 엽서도   구입했다. 카페테리아에서 카페 콘레체와 크롸상을 주문해서 시장을 달래며 선배에게 편지를 끄적이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관람객이 드문드문 있고 소리 없이 움직이는 미술관 스태프들만 있는 미술관의 적막이 주는 기묘한 감동을 어떻게 전할  있을까. 오로지 그림만 내게 말을 걸고 있는  같은  행복한 착각을.


그러다가 마침내 ‘ 마주했다. 고야의 전시실 중에서 ‘다크 페인팅룸에 들어서자마자 정면에 보이는 그림이 ‘라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양옆으로는 책에서 자주 보던 고야의 기괴하고 섬뜩한 명화들, 프랑스와의 전쟁을 그린 명화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순간이 믿기지 않았다.  그림들이  방에 이렇게  전시되어  눈앞에 있다는 . 그리고 정면에 바로 ‘ 있었다. 선배의 문자를 받고 나서 알게  상상 속의 ‘.


그 그림은 다른 것들과 확연히 달랐다. 그냥 직사각형의 텅 빈 화폭 왼쪽 아래에 개의 머리가 있을 뿐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고 뒤로 물러나서 보고 멀찍이 서서 보고 다시 코앞에서 보았다. 모래언덕일까, 늪처럼 삼키는 사막의 모래. 지금 그 모래가 개를 삼키고 있고, 개는 어딘가에 시선을 두고 있다. 간절한 바람의 눈빛일까, 아니면 공허한 절망일까. 어둡고 피가 흐르고 총구의 화염이 번쩍이고, 사지가 잘려있고 내장이 튀어나온 이 방의 다른 어떤 그림들보다 더 우울함이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선배는 왜 이 그림을 그토록 보고 싶어 한 거지. 그 그림에 대한 감상을 이후에도 우린 나누지 않았다. 그냥 보고 왔다고 말했고, 그 개는 그냥 개가 아니라 ‘익사하고 있는 개’였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 개에게 희망이 있을까, 그냥 그런 의문만 아직까지 남았다.  


어쨌든 그 ‘개’가 나를 미술관으로 이끈 건 틀림없다. 내가 그 그림을 좋아하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개’는 잊히지 않는 그림이 되었다. 그렇게 많은 그림들 속에서.


선배의 느닷없는 요구가 뜻밖의 여행을 만들어냈다는 걸, 선배는 미리 알고 그런 주문을 내게 한 걸까.

묻지 않을 거지만, 선배의 마음을 그냥 지금 이 순간은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작가의 이전글 요가, On The Beach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