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단상 #9
열두 살, 열네 살 두 아이들과 한 달 동안 유럽 자동차 여행을 했었다. 여행을 마친 후 집에 돌아와서 아이들은 학교에 제출해야 할 체험학습 보고서를 만들어야 했다. 커다란 도화지에 지도를 그려 넣고 사진도 붙이고 여행 일정과 감상 등을 알록달록한 색 펜으로 꾸며놓았다. 아이들이 마지막에 써 붙인 보고서의 제목은 ‘우리는 한 달 내내 길을 잃었다’이었는데, 그야말로 우리의 여행을 한마디로 정의한 것 같아서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난다.
어느새 스물일곱 살이 된, 열두 살이었던 작은 아이와 한 달 동안 유럽 자동차 여행을 다시 했다. 두꺼운 종이 지도책은 자동차에 자동 연동되는 구글 내비게이션으로 바뀌었고, 관광 명소, 숙박, 음식점에 대한 온갖 정보는 검색어만 치면 자동으로 화면에 나타났다. 말하자면 ‘길을 잃을 일’이 전혀 없다는 얘기다. 여행을 하는 동안 이따금 15년 전의 여행을 회상하면서 도대체 무슨 용기로 어린 두 아이와 그런 여행을 했는지 그 무모함이 믿기지 않았다.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른 그 당시의 여건들이 지금으로선 위험천만하게 여겨졌다. 매일 아침마다 지도책을 펼쳐서 동선을 그려보고 다른 도시로 이동하고 캠핑할 장소를 찾아 운전을 했다. 멀리 처자식을 보내 놓고 남편은 혼자서 얼마나 불안했을까, 지금에서야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런데 그때를 곰곰이 되돌아보면, 아이 둘을 온전히 책임지며, 운전에, 캠핑에, 몸은 고되었지만 불안한 마음은 그다지 크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아이들과 함께하는 모험이 주는 설렘과 충만함이 차곡차곡 채워지는 느낌이랄까.
반대로 이번엔 어디 하나 잘못될 일 없이 안전하고, 든든한 성인이 된 아이의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면 되는 쉬운 여행인데,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한 두려움과 불안이 완전히 떨쳐지지 않은 이유는 도대체 왜일까. 인생을 살면서 겪어 왔던 수많은 실패의 경험들이 피가 되고 살이 되기보다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봐 벌벌 떠는 노파심만 키운 걸까. 30년 넘게 운전하면서 온갖 유형의 사고들을 봐왔기에 초보운전자인 딸의 운전에 심장이 오그라들 것 같고, 수년간 등산의 경험만큼 사고도 경험했기에 동네 뒷산의 비탈진 내리막 등산로에서도 살금살금 걷게 되는 걸 보면.
지워진 줄 알았던 실패와 좌절에 대한 공포는 작은 일에서도 확 되살아난다. 단련된 맷집과 나름의 요령이 있지도 않다. 그냥 견딜 뿐이다. 잠잠해져서 마치 사라진 것 같은 착각에 다시 빠질 때까지.
견딜 수밖에 없고, 그리고 어쨌든 다 지나간다는 걸, 그렇게 알고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