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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회진 May 22. 2019

펜싱 이야기 #6. 철벽남이 되는 법

 펜싱의 3종목 중 플러레는 공격과 방어의 균형이 아주 잘 맞는 스포츠이다. 그 말인 즉슨, 어느 것 하나만 잘해도 충분히 이길 수 있지만 반대로 어느 것 하나가 눈에 띄게 서툴면 그것이 약점이 되어 다 이긴 게임을 허무하게 놓치는 경우도 있다는 뜻이다. 방어가 불리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우선권'이라는 특이한 규칙 때문이다.


 우선권이란 양쪽이 동시에 불이 들어왔을 경우 공격자의 신호만 보고 득점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공격자가 무효타(백색 불)를 찔렀다면 수비자가 유효타(색깔 불)를 찔렀든 무효타를 찔렀든 깡그리 무시해버리고 공격자의 신호만 보고 '공격 무효'를 선언하는 것이다. (우선권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글 하단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 설명을 들은 사람들은 '공격자가 유리하니 무조건 공격만 하면 되겠네.' 라며 따진다. 맞는 말이다. 공격을 해서 단번에 찔러내면 무조건 이긴다. 하지만 그렇게 공격을 하는 게 결코 쉽지 않다. 그 이유는 공격자의 공격 기회는 단 한 번만 주어지며 공격이 막히거나 상대가 피하거나 중간에 우물쭈물하면 그 순간 바로 상대에게 우선권이 넘어가기 때문이다.


 수비의 입장에서 다시 살펴보자. 단 한 번의 공격을 잘 막아내기만 하면 상대는 팔만 뻗어도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자세가 무너진 채 서있게 된다. 그러니 적절하게 방어에 성공만 한다면 힘들게 상대를 쫓아 들어갈 필요 없이 쉽게 득점을 할 절호의 찬스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경우에는 시합에 서툰 선수일수록 수비 연습을 많이 하는 것을 권장한다. (이 부분은 각 클럽, 감독, 코치마다 의견이 다르다. 100% 주관적인 견해임을 밝힌다.)


 철벽남이 되려면 몇 가지 선행조건이 따른다. 일단 겁을 내지 말자. 상대의 공격을 끝까지 보고 적절하게 방어 동작을 취하려면 제법 강심장이어야 한다. 차분하게 상대를 기다려야 하고 대담하게 상대를 끌어들여야 한다. 방어 중간에 겁을 집어먹고 검을 막 휘두르다 보면 상대의 페인팅에 걸리게 된다.


 두 번째로는 눈치가 빠르면 좋다. 어떤 선수든 공격 직전에 약간의 준비 동작이 드러난다. 처음에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더라도 몇 차례 같은 상황이 반복되면 특정 패턴이 눈에 걸린다. 어떤 준비 동작 뒤에 어떤 각도의 공격이 이어지는지를 재빠르게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공격이 시작되는 시점만 파악해도 방어 성공률은 크게 올라간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다리로(스텝으로) 방어를 해야 한다. 우리는 클럽에 등록하면 앙가드(En Garde)라는 동작을 배운다. 이 동작은 완벽한 공격 준비 동작임과 동시에 방어 동작이다. 상대의 검을 쳐내기 위해 무리하게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앙가드 자세를 취하는 것이 더 단단하게 느껴진다. 물론 상대가 들어오는 대로 마냥 뒤로 빠져서는 곤란하겠지만 중간에 공격을 끊겠다고 검을 뻗으며 허우적거리는 게 더 안 좋다. 상대가 공격하기 좋은 거리에 가만히 서있으면 안 된다. 때로는 조금 가깝게, 또 조금 멀게 거리를 유지해 상대가 마음 놓고 공격하기 애매한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정리를 하자면, 굳건한 앙가드 동작을 취한 채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상대의 공격을 차분히 기다린다. 몸 안쪽 깊숙이 들어오지 않는 동작은 모두 페인트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좋다. 나의 몸 안쪽으로 팔을 뻗어 직선으로 날아오는 위협적인 공격만을 진짜 공격으로 간주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한다. 그것이 방어의 정석이다.


 쉽게 풀어쓰려고 했지만 글로 써놓고 보니 꽤나 복잡해 보인다. 저 짧은 순간에 페인트와 진짜 공격을 구분하라고? 그게 가능한가?


 물론 가능하다. 페인트는 공격 거리가 짧고 장황하지만 진짜 공격은 깊고 빠르다. 눈을 크게 뜨고 잘 살펴보면 구별할 수 있다. 물론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엄청난 운동 신경이나 반사 속도가 필요한 일도 아니다. 그냥 겁먹지 말고 눈 크게 뜨고 상대의 동작을 끝까지 지켜보면 된다. 정 어렵다면 차라리 수비를  포기하고 상대가 나를 찔러 득점에 성공할 때까지 공격 동작을 끝까지 지켜보자. 몇 번 연습하다 보면 분명히 무언가 눈에 걸리는 게 있을 것이다.


 펜싱에서 수비는 손이 아니라 발로 하는 것이다.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앙가드 자세만 잘 취하고 있어도 상대는 쉽사리 공격을 하지 못한다. 앙가드 자세를 풀고 리드미컬하게 몸을 움직이는 유튜브 시합 영상에 절대 혹하지 말자. 우리는 그들과 겨룰 일이 없다.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면 그 즉시 반격의 기회가 생긴다. 상대의 공격을 강하게 쳐냈느냐, 가볍게 잡아냈느냐, 톡 하고 건드렸느냐에 따라 반격의 기술이 달라진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있다. 방어에 성공했다면 절대 흥분해선 안 된다. 잘 막아놓고선 검을 쥔 손에 너무 힘을 준 나머지 허공을 찌르거나 엉뚱한 곳을 찔러 절호와 같은 기회를 날려버리는 경우가 많다. 방어에 성공했다면 정확하게 상대겨누고 자신있게 찌르자.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





우선권 (priorité) : '프리오리떼' 라고 읽는다. 이것은 플러레와 사브르에만 적용되는 규칙이다. 간혹 올림픽 중계 등에서 이것을 '공격 우선권' 또는 '공격권'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명백히 틀린 표현이다. 이것은 동시 공격에 의해 양 쪽 신호기에 모두 불이 들어온 경우 판정을 위해 사용되는 규칙이다. 동시타 상황이 발생한 경우 공격자의 신호(불 색깔)만 보고 그것을 우선하여 득점 판정을 내리는 것이다. 공격자가 유효타, 방어자가 유효타라면 공격자의 유효타만을 인정하고, 공격자가 무효면을 찔러 무효타(백색 불)라면 방어자의 우효/무효는 완전히 무시한 채 공격 무효를 선언한다. 우선권은 반드시 동시에 양쪽에 불이 들어온 경우에만 적용되며 공격자와 방어자 중 어느 한쪽에만 불이 들어온다면 우선권은 적용되지 않는다. 공수에 상관없이 백색 불 하나만 들어오면 무효, 색깔 불 니만 들어오면 그 선수의 득점을 인정한다. 공격권이나 공격 우선권이란 단어는 '동시타의 경우,공격자에게 판정에 대한 우선권을 준다'는 문장을 잘못 줄인 말이다. (공격권/공격 우선권이라는 단어는 사람들로 하여금 꼭 이 티켓이 없으면 공격을 할 수 없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펜싱을 어렵게 만드는 주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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