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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회진 Jun 05. 2019

펜싱 이야기 #8. 나는 재능이 없는 걸까?

 어떤 운동이든 처음엔 마냥 즐겁다.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가득 행복감을 느낀다. 서툴러도 즐겁고, 져도 즐겁고, 심지어 다쳐도 즐겁다. 그런 만족감이 쭉 이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새로움이 익숙함으로 변할 때쯤 첫 번째 위기가 찾아온다. 마치 제2외국어를 익히는 것과 비슷하다. 처음엔 배워야 할 게 너무도 많기 때문에 못하는 것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을 시간이 없다. 하지만 시제에 따라 불규칙적으로 변하는 동사라든가 철자는 비슷하지만 전혀 뜻이 다른 단어들을 외워야 할 때가 오면 슬슬 지치기 시작한다.


 펜싱도 마찬가지다. 기본기를 어느 정도 익히고, 그것을 활용해야 할 단계가 오면 본격적인 스트레스가 시작된다.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은데 몇 센티미터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가는 선배 선수들과 무섭게 쫓아오는 후배 선수들 사이에서 나 혼자만 제자리 뛰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조급해진다.


 동료들은 단단한 벽돌이 되어 가고 있는데 나는 여전히 치즈 덩어리인 것 같다.


 어쩌다 승리를 한다 해도 그건 그냥 운이었을 뿐이다.


 처음엔 잘 되던 것들이 잘 안되기 시작한다.


 쉬운 동작 하나도 깔끔하게 해내지 못하는 내 모습에 갑갑증을 느낀다.


 나는 펜싱에 재능이 없는 것 같다.


 만일 당신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축하합니다. 당신은 제대로 하고 있습니다."라고 박수를 쳐주고 싶다.


 클럽에서는 펜싱에 재미를 붙일 수 있도록 비슷한 수준의 선수들끼리 게임을 매칭 해준다. 초심자는 상대의 움직임을 생각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막 해버린다. 그래서 상대보다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기만 한다면 승률이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내가 좀 하는구나.'하고 착각하기 딱 좋다.


 경험이 조금 쌓이면 슬슬 상대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면 상대의 방어를 멋지게 뚫고 싶고, 상대의 공격을 깔끔하게 막고 싶어진다. 이제 상대 선수와의 거리를 조절하기 시작한다. 처음엔 상대의 팔을, 그다음엔 다리를, 그리고 나중에는 상대의 몸 전체를 보고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려 한다. 그러면서 생각이 많아지고 머릿속이 복잡해지면서 모든 게 꼬여 버린다.


 예전엔 거리가 대충 맞다 싶으면 달려 들어가 냅다 찔러댔다면 이제는 중간 거리에서 페인트 동작을 사용해 상대의 헛손질을 유도하기 시작한다. 상대의 방어 패턴을 파악하려고 엉성한 공격을 시도하다 반격을 당하고, 도망가는 상대를 추격하다 역습을 당해 허무하게 포인트를 빼앗긴다. 그러는 사이에 불도저 같던 자신감은 어느새 눈 녹 듯 사라지고 어중간한 거리에서 우물쭈물하다 상대에게 승기를 빼앗긴다. 대충 하면 이기는데 열심히 하면 진다. 펜싱의 첫 슬럼프는 이렇게 찾아온다.


 나는 이런 슬럼프가 빨리 찾아올수록 더 칭찬해주는 편이다.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동물적인 감각을 겨루는 칼싸움이 아니라 복잡한 기술과 규칙이 있는 펜싱이기 때문이다. 첫 슬럼프는 상대의 움직임을 관찰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상대 선수의 자세와 반응에 따라 수시로 전술을 수정하며 공격을 시도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즉, 이 슬럼프라는 놈은 운동을 제대로 하고 있다면 반드시 마주하게 되는 첫 판 보스인 셈이다.


 지금까지는 펜싱에 대해 교육을 받고 기본적인 원리를 암기하는 학습 과정이었다면 이제는 그것을 실전에 적용하는 응용 과정에 들어섰다. 지금까지의 경기력은 오로지 코치의 레슨과 자신의 노력으로만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다른 선수들과 겨루면서 스스로 진화할 때가 되었다.


 내가 '어떤 스타일의 선수가 될 것인가'는 사실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선수와 어떤 시합을 펼쳤느냐에 따라 나의 펜싱 스타일이 결정된다. 내가 자주 겨룬 상대의 단점이 나의 주 공격 루트가 되고, 자주 실점을 한 루트가 나의 약점이 된다. 다양한 스타일의 선수와의 경험이 많을수록 나의 비상금 봉투가 두둑해진다. 큰 무대를 갖춘 큰 시합에 자주 참가할수록 배짱과 여유가 생긴다. 경험과 반성, 노력을 잘 버무려 낼 수만 있다면 그깟 재능 따위 없더라도 나도 꽤나 매력적인 선수가 될 수 있다.


 프로 스포츠에서 재능은 축복이다. 하지만 아마추어 스포츠에서는? 글쎄, 잘 모르겠다. 애매한 재능은 노력보다 더 많은 승리를 가져다준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것이 거대한 벽이 되는 것을 너무 많이 봐왔다. 재미로, 취미로 하는 아마추어 스포츠에서 재능을 뛰어넘는 노력을 보여주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그들 중 거의 대부분은 '이 정도면 됐다.'라는 말과 함께 조용히 (다른 업계를 맛보러) 떠나갔다.


 나는 재능이 없다. 그래서 참패에도 자존심을 다치지 않고 석패에도 하늘을 탓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렇게 오래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이런 이 있다.


 '500원짜리 음료수를 마시려면 500원을 넣어야 한다. 400원을 넣는다고 400원어치만큼 나오지 않는다. 우리의 노력도 임계점을 넘겨야 결과를 맛볼 수 있다.'


 슬럼프를 극복하려면 지금보다 더 고민하고 더 노력하는 방법밖에 없다. 내가 지금까지 얼마를 넣었는지 잘 모르겠다면, 눈 딱 감고 딱 100원어치만 더 노력해보자. 100원으로 반응이 없다면 50원 더, 20원 더, 10원만 더 넣어보자.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분명 덜컹하는 기분 좋은 소음과 함께 시원한 음료수가 당신 앞으로 또르르 굴러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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