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회진 Jun 12. 2019

펜싱 이야기 #9. 두려움에 손과 발이 묶였다면.

 14대 14, 마지막 1점을 남겨둔 피스트. 시작과 동시에 기세 좋게 뛰어나가긴 하지만 쉽사리 공격을 펼치지 못한다. 헛구역질이 올라올 만큼 숨이 가쁘다. 생각이 많아 머릿속이 복잡하다. 기선 제압에 성공해 놓고도 우물쭈물거린다.


 내 공격이 막히지 않을까, 실수하지는 않을까, 혹시나 아슬아슬하게 상대의 타깃을 빗맞히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아주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의 손발을 무겁게 만든다. 몸이 움츠러든다. 스탭은 평소보다 훨씬 커지고 페인팅 동작은 훨씬 조악해진다. 승리까지 단 1점 만을 남겨두고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한 상대의 공격에 결국 패하고 만다.


 무엇이 당신을 주저하게 만들었는가? 오늘의 주제는 바로 '두려움'이다.


 운동에서 느끼는 두려움은 대부분 자신에 대한 과소평가와 상대에 대한 과대평가가 잘 버무려진 결과이다. 시합장에서 평소보다 몸이 가벼운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간단하게 연습을 하며 몸을 풀다 보면 '오늘은 뭐가 잘 안된다', '잘 안 풀린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그에 반해 시합에 출전한 다른 선수들은 모두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다. 누군가는 웃고 있고, 누군가는 뭔가를 먹고 있고 또 누군가는 아직은 차가운 피스트 위에서 (무려!) 셀카를 찍고 있다. 몸을 푸는 동작도 어쩐지 파워가 넘치는 것 같고 허벅지 근육도 나보다 훨씬 빵빵한 것 같다. 여기서 내가 제일 못하는 것 같고 내가 제일 약한 것 같다는 불안감이 목을 조른다. 그래서 시합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벌써 기에 눌러 버린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차라리 두려움과 타협을 해야 한다. 두려움을 받아들여야 한다. 경기 초반에는 심리적 열세를 체력으로 극복이 가능하지만 체력이 떨어진 후반에는 오로지 정신력만으로 버텨야 한다. 이럴 땐 경기 시작 전 느꼈던 두려움이 상당한 부담이 된다. 시합이 막바지로 향할수록 경기 초중반엔 잊고 있었던 두려움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온다. 그리고 마지막 1점 싸움이 되면 하루 종일 나를 괴롭혔던 두려움이 극에 달하게 된다.


 상대를 마주한 당신은 분명 두려울 것이다. 그럴 땐 차라리 두려움이 온몸에 스며들도록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자. 소리 내어 다섯을 세자. 심호흡을 하며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듣자. 그런다고 두려움은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대신 두려움을 이용할 방법이 생긴다.


 두려움은 거대한 에너지원이다. 근육은 팽창하고 동공은 확대된다. 관자놀이에서 쾅쾅 울려대는 심장 박동 소리에 박자를 맞추어 보자. 이제 우린 그 거대한 두려움을 동력 삼아 마지막 공격을 시작할 준비가 된 것이다. 


 검 끝에 온 신경을 모으고 1초를 10으로 100으로 쪼개어 섬세하게 움직이자. 악착 같이 상대에게 따라붙어야 한다. 힘들수록 스탭을 더 잘게 쪼개야 한다. 한 번에 움직일 거리를 서너 번에 나눠 잘게 작게 움직이자. 상대도 나 못지않게 힘들고, 또 긴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페인트는 좀 더 섬세해져야 한다. 어설픈 페인트는 내 공격 의도만 드러낼 뿐이다. 클라이맥스로 향하는 지휘자의 봉처럼 예민하고 자신만만해야 한다.


 상대가 섣불리 반격하지 못하도록 자세를 충분히 낮추자. 힘들다고 질질 발을 끌어선 안 된다. 그러면 상대는 나의 공격이 시작되는 순간을 소리로 알아차리게 된다.


 상대의 검을 툭툭 치면서 상대를 피스트의 끝, 라인 아웃 직전까지 밀어붙이자. 상대가 기습적인 공격을 시도할 엄두도 내지 못하도록 단단한 자세를 취하자. 상대와 너무 가까워지면 역습을 당할 수 있으니 계속 적절한 거리를 재면서 천천히, 하지만 위협적인 자세로 슬금슬금 앞으로 나아가자. 피스트 끝까지 몰린 상대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발을 멈출 것이다. 이제 상대는 반격을 준비할 것이다.


  자, 이제 마지막이다. 상대는 방어를 하거나 역습을 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다리를 벌리고 검을 세운 상대는 반격을 시도할 것이다. 자세를 낮추고 검을 앞으로 쭉 빼는 동작을 취한 상대는 분명 나의 공격을 옆이나 아래로 피하며 역습을 시도할 것이다. 상대가 준비 동작을 보고 어떤 공격을 펼칠지 빠르게 판단하고 과감히 결정하자.


 이제 공격을 시작할 시간이다. 계획대로 확실하게 찌르고 들어가면 된다. 클럽에서 처음 배운 동작들을 떠올리자. 호흡을 멈추고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자. 준비동작이 노출되지 않도록 단숨에 깊고 빠르게 공격하자. 지는 게 싫다면 아예 시작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시작을 해버렸다면 우리는 그냥 끝까지 가보는 수밖에 없다. 


 마지막 1점을 위한 화살은 발사되었다. 이제 그 결과는 우리의 몫이 아니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집념을 놓지 않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설령 마지막 1점이 나의 것이 되지 못하더라도 너무 아쉬워하지 말자. 그건 '오늘만큼은' 상대 선수가 나보다 한 수 위였다는 뜻이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펜싱 이야기 #8. 나는 재능이 없는 걸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