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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회진 Jun 19. 2019

펜싱 이야기 #10. 속고 속이는 스파이 게임

 펜싱을 하면서 가장 짜릿한 순간은 언제일까? 그건 바로 상대의 방어 패턴을 정확히 분석한 뒤 치밀하게 계산된 복잡하고 정교한 공격을 성공했을 때이다. 검이 예쁜 곡선을 그리며 피스트 위를 날아다니다 갑자기 방향을 틀어 상대를 향해 곧장 뻗어나간다. 재킷에 닿은 검이 초승달처럼 크게 휘어지고 손목에 두툼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상대는 심판기에 불이 들어오고 나서야 자신이 찔렸음을 깨닫게 된다. 상대 선수는 완벽하게 파악당했다는 아찔함에 '아!' 하는 깊은 신음을 토해낸다. 뒤이어 관중석에서는 짧지만 뜨거운 환호가 쏟아진다. 그때 느끼는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 1점을 따내기 위해 내가 그동안 그 고생을 한 것이다. 환호는 5초도 안돼 끝나지만 희열은 정말 몇 달 동안 지속된다.


 펜싱은 다양한 공격 동작이 있지만 결국에는 '찌르기'로 끝이 난다. 그래서 노련한 선수들은 상대의 마지막 찌르기 동작만을 골라내어 방어를 한다. 그러니 초보자가 괴물 같은 체력을 무기로 맹공을 퍼붓더라도 실력자를 상대로 쉽게 이길 수가 없다.


 초보자의 페인팅이 전혀 통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초보 레벨을 벗어난 선수는 본격적인 복합 공격을 시도한다. 복합 공격이라 함은 상대에게 거짓 공격을 시도하여 상대가 방어를 하게 만든 뒤 그것을 피해 공격하는 기술들을 말한다. 초보자의 가장 큰 문제점은 상대에게 거짓으로 주는 공격이 너무 티가 난다는 데에 있다. 상대도 바보가 아닌 이상 막을 만한 공격이라야 방어를 한다. 자신과는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허둥거리며 찔러 들어오는 가짜 공격 동작은 방어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일단 거짓 공격을 한 번 줬다고 상대의 반응은 보지도 않고 곧바로 다음 단계로 넘어가버린다. 상대와의 거리, 대응, 타이밍을 싸그리 무시한 채 (나쁜 의미로서의) 교과서적인 공격을 시도하다보니 너무도 쉽게 상대에게 막혀버리는 것이다.


 일정 수준에 도달한 선수들은 종종 단순 공격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리곤 한다. 그래서 당연히 연습도 하지 않는다. 복잡하고 화려한 공격 동작만 반복적으로 연습을 하다 보니 공격은 자꾸만 부풀어 간다. 속지 않는 상대에게 두 번, 세 번, 그것도 안되면 네 번이나 페인팅 동작을 섞는다. 그러면서 상대와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진다. 결국 혼자 들어가 (아무것도 해보지도 못하고) 혼자 찔리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페인팅을 훈련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간단하다. 페인팅을 쓰지 않으면 된다. 페인팅이라고 마음 먹고 시작하는 공격은 공격 거리가 짧고 동작이 거칠다. 수비하는 입장에선 뒤로 한 발만 물러나도 사정거리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굳이 막을 필요도 없다. 페인팅 동작도 공격이어야 한다. 동작만 보고 페인팅인지 공격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위협적이어야 한다. 기회를 틈타 단순 공격을 시도하는 것처럼 보여야 상대가 방어를 시도한다. 묵직하게 쑥 들어가다가 갑자기 방향을 트는 것, 그것이 진짜 복합 공격이다. 그렇게 되려면 지겹더라도 단순 공격 연습을 꾸준히 해나가야 한다. 깊고 빠르게, 하지만 예비 동작을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간결함이야 말로 펜싱의 정수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중요한 훈련 포인트는 반드시 단순 공격과 복합 공격을 돌아가며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페인팅 동작을 연습하다 막히면 '그 느낌을 살려' 단순 공격을 연습하고, 그게 좀 지겹다 싶으면 '그 느낌을 살려' 다시 복합 공격을 연습하는 것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느낌'이다. '느낌'이라는 단어가 좀 애매하다면 그것을 '리듬'으로 바꿔 생각해도 좋다. 단순 공격을 리드미컬하게, 복합 공격을 담백하게 한다. 단순 공격을 단순하게 해버리면 아무 것도 안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반대로 복합 공격을 복잡하게 하면 상대와의 거리감을 잃게 되고 너무 쉽게 역습을 당하게 된다. 단순 공격과 복합 공격은 하나의 목적지를 향한 두 개의 차선이다. 따로따로 훈련해서는 안된다.


 상대를 속이는 것은 반드시 검으로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많은 선수들은 손보다 몸과 다리를 이용한 페인팅을 훨씬 많이 사용한다. 아무리 연습을 많이 했다 하더라도 공격 준비 동작을 완벽히 감출 수는 없다. 그래서 이동 중에 작은 페인트 동작을 끼워 넣어 어떤 동작이 공격 준비 동작인지 상대가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작전을 펼친다.


 수비자에게도 페인팅은 매우 중요하다. 역습하는 척하다 그대로 뒤로 빠져 방어를 하고, 방어하는 척하다 기습적으로 역습을 시도하는 등 끊임없이 수싸움을 해야 한다. 때론 공격하는 상대를 맞이하러 뛰어들어가기도 해야 하고 겁먹은 척 도망치다 갑자기 역습을 시도해야 한다. 그래야 상대가 마음 놓고 뛰어 들어오지 못한다.

 

 때로는 15포인트 시합의 승리를 위해 초반을 통째로 페인트로 쓰기도 한다. 나의 경우에는 상대의 습관을 파악하기 위해 처음 2~3점은 일부러 찔려주는 편이다. 상대가 공격형인지 방어형인지 파악하기 위해 경기 시작과 동시에 어설프게 달려 나가 찔리기도 하고, 약점을 들킨 양 고의로 한두 점을 내어주기도 한다. 상대의 패턴만 파악한다면 두 세 점 정도는 쉽게 따라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펜싱은 속고 속이는, 가끔은 일부러 속은 척하기도 해야 하는 정말 골치가 아픈 스포츠이다. 하지만 노력이 재능을 뛰어넘을 수 있고 도전빨이 장비빨을 이길 수 있는 운동이다. 노력도 재능임을 깨닫게 해주는 땀냄새 지긋지긋한 이 멋진 무대로 올라오는 모든 이들에게 환영의 인사를 전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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