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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회진 Jun 26. 2019

펜싱 이야기 #11. 15점을 운용하는 방법

 펜싱에서 예선전은 5점, 본선은 15점을 먼저 따면 승리를 거둔다. 예선은 3분, 본선은 3분 3회전으로 총 9분 동안 시합을 치른다.


 일단 예선전에서는 대개 3분 안에 (남성들은 1분 30초 안에) 결판이 난다. 페이스 조절을 위해 완급 조절을 한다거나 상황에 따른 다양한 전술을 구사하는 위험을 감수하기엔 목표 점수가 너무 낮다. 그래서 예선전은 풀파워로 후다닥 끝나는 경우가 많다. 둘 중 기량이 뛰어난 사람이 이기고, 기량이 비슷하다면 겁이 없는 사람이 이기고, 그마저도 비슷하다면 마지막엔 운으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본선 시합은 전혀 다르다. 4, 5점은 말할 것도 없고 10점 정도의 스코어 차이도 안심할 수 없는 것이 본선이다. 펜싱은 상당히 짧은 거리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시작과 동시에 교전이 펼쳐진다. 그래서 다른 스포츠와는 다르게 버려지는 시간이 없다. 1초, 2초가 상당히 길게 느껴진다. 그래서 관객들은 마지막까지 역전승을 기대하게 되고, 선수들은 끝날 때까지 긴장을 놓지 못한다.


 서로가 서로를 잘 아는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 초반 3점은 상대의 성향을 파악하는 데 쓴다. 공격형인지 수비형인지 가장 먼저 파악을 하고, 그다음은 손 기술이 좋은지 스텝이 좋은지를 파악한다. 그리고 공격형이라면 돌격형인지 거리 조절형인지를, 수비형이라면 방어형인지 역습형인지를 첫 3점 안에 파악해야 한다.


 초반 신경전이 한 1분 정도 진행되는데 그것이 끝나면 이제 본격적인 교전이 벌어진다. 4점부터 12점까지를 중반이라 보면 된다. 이 시기에는 가용한 모든 체력과 기술을 동원해 상대를 공략해야 한다. 이때 중요한 점은 단순히 밀어붙이기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공격을 하면서 끊임없이 상대를 관찰해야 한다. 그래야 길목에 정확히 덫을 놓을 수 있다.


 상대가 습관적으로 검을 들지 않는가, 공격 직전에 팔을 빼지 않는가, 근접한 상황에 의도적으로 몸을 밀착시키지는 않는가, 갑자기 빠른 속도로 접근하면 놀라지는 않는가.


 상대의 반응을 관찰하자. 공격할 땐 그에 맞는 적절한 무기를 꺼내고 방어를 할 땐 적당한 곳에 함정을 파놓자. 나쁜 버릇을 가진 척 연기하고, 녹초가 된 듯 헉헉거리며 상대가 나를 압도했다고 생각하게 만들자. 다친 사슴을 사냥하듯 덤벼드는 상대에겐 과감하게 역습을 시도하고, 뭘 할지 아직 정하지 못한 상대에게 터벅터벅 걸어가 꾹 하고 찔러버리자. 지친 듯 다리를 끌다가 예고도 없이 빠르게 치고 들어가고, 방어가 단단한 상대에겐 짧고 빠른 공격을 던져 나를 쫓아 스스로 성문을 열고 나오도록 하자.


 좋은 함정은 상대를 겁을 먹게 하지 않고 도리어 궁금하게 만든다. 함정으로 많은 득점을 내지는 못하지만 게임의 흐름은 완전히 바꿀 수 있다. 이기고 있다면 압도할 수 있고, 따라 잡히고 있다면 뿌리칠 수 있고, 밀리고 있다면 역전의 계기로 삼을 수 있다.


 13점부터는 후반부이다. 앞으로 3점이다. 마지막 3점을 따기 위해 오십 번, 백 번씩 검이 오가기도 한다. 체력은 이미 오래전에 바닥났다. 쓸 수 있는 기술은 모조리 다 보여줬고, 함정은 전부 다 파 해쳐진 상태이다. 이제는 집중력과 담력으로 싸울 때이다.


 후반으로 가면 수비를 잘하지 않는다. 공격자에 맞춰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체력 소모도 크고 실패했을 때 바로 실점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게임의 후반부는 시작과 동시에 공격을 한다거나 방어 대신 피하고 바로 역습을 하는 등 체력을 적게 쓰는 동작을 많이 하게 된다. 공격은 단순해지고 스텝은 느려진다. 방어보다는 공격을, 방어보다는 역습을 많이 시도한다. 이제 결정을 해야 한다. 아직 다리가 움직인다면, 상대의 움직임을 판단할 체력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승부를 그냥 운에 맡겨서는 안 된다. 고통스럽더라도 조금만 참자. 끝으로 갈수록 더 많이 움직여야 한다. 시합이 끝나고 느끼는 가장 큰 아쉬움은 패배가 아니라 포기이기 때분이다.


 후반은 내가 가장 잘하는 것, 제일 자신 있는 것만 골라서 하자. 불안한 마음에 시작과 동시에 전술에 대한 고민도 없이 상대에게 달려드는 어리석은 짓은 피하자. 바닥난 체력으로도 섬세하게 조절할 수 있는 기술만 몇 개 골라서 끈질기게 따라붙자.


 수비할 땐 한 발짝만 더 빠지고, 공격할 땐 조금만 더 천천히 들어가자. 검의 끝에 힘을 실어 똑바로 찌르자. 흥분하지도 포기하지도 말자. 느려도 괜찮다. 다리를 끌어도 괜찮다. 하지만 '아무 곳이나 걸려라' 하며 대충 찔러대지는 말자. 마지막 1점은 눈을 뜨고 찌른 자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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