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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회진 Jul 31. 2019

펜싱 이야기 #16. 기본.

 모든 일이 그렇다. 기본이 가장 중요하다.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지만 대부분은 그 사실을 무시한다. 기본에 충실한 사람의 요리는 같은 재료로도 흉내쟁이의 그것에 비해 훨씬 풍부한 맛을 내고, 기본기 확실한 사진작가의 사진은 SNS 속 초보들의 화려한 사진보다 더 묵직한 감동을 준다.


 모든 교육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가장 먼저 배운다. 사용 빈도가 잦고 활용도가 높은 것부터 차근차근 배워 나간다. 1년간 공부를 한다고 가정했을 때, 처음 한 달 동안 배운 것이 남은 11개월 동안 배운 모든 것에 비해 훨씬 많이 쓰인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모범적인 스포츠맨은 기본기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매일 단 5분이라도 자세 연습을 한다. 거울 앞이라면 더욱 효과적이다. 최대한 정확한 자세로 동작을 하나하나 점검한다. 시간이 여의치 않을 땐 눈을 감고 이미지 트레이닝이라도 하려고 노력한다. 그들은 마무리를 장식하는 것은 결국 기본기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펜싱에서 기본기는 스탭이다. 처음 배울 때 스탭은 단순히 상대와의 거리 유지만을 위해 사용되지만 어느 정도 숙련이 되고 나면 스탭 자체가 공격이고 방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원할 때 원하는 만큼 이동하고, 원하는 곳에 멈추고, 자유자재로 리듬과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상대를 압도할 수 있게 된다.


 스탭 연습을 잘하려면 각자 스타일에 맞는 리듬을 가지는 것이 좋다. 아무리 스텝이 빠르더라도 같은 속도로 계속 이동을 한다면 상대는 금방 그 속도에 익숙해진다. 속도는 상대적인 것이다. 느림이 있어야 빠름도 있다. 그래서 느리다가 빠르게, 빠르다가 느리게 변화를 줘야 한다. 그러려면 연습할 때부터 리드미컬한 스탭을 시도해야 한다.


 공격을 나갈 땐 자세를 낮추고 보폭을 작게 줄이는 것이 좋다. 표범이나 치타를 떠올려 보자. 언제든 공격을 시작할 수 있지만 언제 시작되는지 짐작도 할 수 없도록 눈에 힘을 빡 주고 야금야금 앞으로 나가자.

 

 공격은 페인팅 동작이 아주 중요한데,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는 것보다는 땅에 발을 딛는 순간 동작이 바꾸며 상대를 속이는 것이 더 안전하다. 섬세한 페인팅을 위해서는 보폭을 줄여 짧게 이동하고 가능한 두 발이 땅에 붙어 있는 순간이 많아야 한다. 한 발이 땅에 떠 있을 때 검의 방향을 비튼다고 생각해보자. 한 두 번 정도 변칙적으로는 가능하겠지만 계속하는 것은 위험하다. 몸이 떠있는 상태에서 큰 동작을 시도하다 역습을 당하면 즉각 대응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검에 힘을 실으려면 도움닫기를 이용, 중력(체중)을 활용해야 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허공에선 오로지 팔 힘만으로 해야 한다. 이미 한 번 검을 꺾으면서 몸의 균형이 흔들렸기 때문에 땅을 딛지 않고 짧은 시간에 한 번 더 검을 비틀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처음부터 상대의 역습을 기다리며 에 대한 반격을 의도한 게 아니라면 굳이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차라리 걸음을 잘게 쪼개어 살금살금 상대 구역을 침범해나가다가 기회가 왔을 때 단숨에 치고 나가는 편을 추천한다.


 운동을 시작하면 둥글게 서서 스트레칭을 하고 이어 체력 훈련을 겸한 단체 스탭 훈련을 한다. 스탭 훈련을 할 때 코치의 지시에 맞춰 단순히 스탭을 따라만 할 것이 아니라 나름의 리듬과 의미를 붙여 훈련을 하자. 한 발짝, 한 발짝이 정확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스텝 훈련은 단체 훈련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찌르기 훈련은 그렇지 않다. 거울을 보며 훈련을 하는 것도 물론 좋지만 제대로 훈련을 하려면 무언가 찔러야 한다. 클럽에 타격대가 여러 개가 있을 리가 없으니 찌르기 단체 훈련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결국 혼자 해야 한다는 소리다.


 그러려면 남들보다 클럽에 10분 정도 먼저 와야 한다. 도착하자마자 간단하게 손목을 풀고 곧바로 장갑을 끼고 검을 잡아야 한다. 복잡한 기술 연습을 할 필요 없다. 그냥 '정확하게 찌르기'만 연습하면 된다. 원하는 거리에서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곳을 정확하게 찌르도록 자세를 교정하자. 표적을 정하고 손을 먼저 뻗고 피스트를 박차면서 이상적인 팡트를 연습하자. 코스를 미리 정해두면 편하다. 처음엔 그냥 찌르기, 그다음은 팡트, 그리고 하나씩 기술을 더하면서 찌르고자 하는 곳을 정확히 찌르자. 자세에 빈틈이 없어야 한다. 속도를 늦춰도 되고 거리를 좁혀도 된다. 지금은 오직 찌르기만 연습하자.


 우리는 바쁘다. 일을 하고 공부를 하고 육아를 하고 뭐 그러면서 이력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펜싱을 위해 돈을 들이고 클럽에 오는 자체가 정말 대단한 일이다. 시험, 야근, 회식, 당직, 부부 싸움, 생일, 기념일 등 운동을 빠질 핑계는 숱하게 널려 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꾸준히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늘 감탄과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딱 10분이다. 그 10분이 몇 년 쌓이면 디테일이 달라진다. 코치가 '정확한 자세'라고 가르치는 자세는 그 자세가 가장 예뻐서가 아니다. 그 자세에서 가장 잘 찌를 수 있기 때문에 그 동작에 이름을 붙이고 공식을 붙여서 우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그런 건 이미지 트레이닝만으로는 절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직접 찔러야 한다. 사람마다 팔의 길이가 다르고 손목의 힘이 다르다. 어떤 각도에서 검이 부드럽게 꺾이는지, 어떤 상황에서 검이 뒤집어지는지, 어떤 경우에는 검을 밖으로 빼서 찔러야 할지, 그런 것들은 누가 일일이 가르쳐 줄 수 없다. 직접 찔러봐야 알 수 있다. 움직이지 않는 타깃에 연습해봐야만 자신에게 가장 맞는 자세(각도)를 찾을 수 있다.


 기본기는 영어 단어 외우기와 수학 연산 문제 풀기와 비슷하다. 구몬학습이나 눈높이 선생님이 오시는 날이면 어디에 어떻게 숨을지 고민했던 시절을 떠올려보자. 그리고 비싼 보습학원에서 진도 빼기에 바빠 늘 숙제를 한 트럭씩 내주곤 했던 추억들을 한 번 생각해보자. 우리는 숙제 검사가 싫어 땡땡이를 쳤고, 쪽지 시험이라도 보면 사기라도 당한 심정으로 선생님을 바라보곤 했었다.


 그땐 왜 그렇게 지겨운 숙제를 많이 내줬는지 몰랐지만 이제는 알아야 한다. 영어 단어 외우기라든가 두 자릿수 곱셈, 세 자릿수 곱셈 같은 건 그 과목을 진행하기 위해 갖춰야 할 최소한의 기본기였던 것이다. 단어를 모르면 문장을 해석할 수 없다. 복잡한 수식을 쪼개 보면 단순한 연산 문제 여러 개로 나뉜다. 그것을 어떠한 상황에서 마주쳐도 당황하지 않고 실수 없이 반사적으로 풀어내기 위해서 단순 반복 훈련이 필요했던 것이다. (물론 수업 시간에 영어 단어 50개씩 외우게 하고 연산 문제 100개씩 풀게 했으면 그 학원은 금방 망했을 것이다.)


 기본기 연습은 혼자 해야 한다. 클럽에 회비를 냈으면 그 시간에는 기술을 배우고 전술을 배우고 요령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 기술을 온전히 내 것으로 장착하려면 기본기가 갖춰져 있어야 한다. 나에게 페라리가 뚝 하고 떨어져도 기름값이 없고 보험료가 없고 운전면허가 없다면 그것은 비싼 피규어에 불가하다.


 고급 기술은 수준 높은 기본기를 요구한다. 고급기 배우고 익히고 사용하기 위해선 꾸준히 기본기를 다듬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단순 반복 훈련밖에는 방법이 없다. 시간과 공을 들여 스스로를 다듬어 놓지 않으면 국가 대표가 아니라 우주 대표가 와도 내 실력은 제자리걸음일 것이다.


 아마추어 amateur는 라틴어 amare (사랑하다)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아마추어 펜서는 '펜싱을 사랑해서 아무런 이익이나 목적 없이 그저 펜싱을 하는 사람'이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당신은 프로보다 더 나은 펜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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