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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회진 Aug 07. 2019

펜싱 이야기 #.17 무게 중심을 낮추자

 펜싱은 속도와 거리의 스포츠이다. 발이 빠르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고 느리다고 마냥 불리한 것도 아니다. 거리도 마찬가지라서 가깝다고 유리하지도 않고 멀다고 불리하지도 않다.


 필요한 순간에 원하는 거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한데 우리는 그것이 실력이라고 부른다. 상황에 맞는 거리 조절 능력은 상대의 기술과 체력의 우위를 극복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다.


 타이밍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몸의 균형을 잘 이용해야 한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키와 신체 조건에 가장 알맞은 보폭을 찾는 일이다. 이것은 안정적인 자세로 서 있다가 앞과 뒤로 이동한 이후에도 같은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는 뜻이다. 참 간단한 일인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잘 못한다.


 초보자들은 보폭이 좁고 위로 붕 떠있는 자세를 취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그리고 왜 그런 자세를 취하냐고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은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고 한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다. 엉성한 자세를 취하는 이유, 이동할수록 보폭이 좁아지는 이유는 바른 자세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다. 보폭을 넓게 잡으면 거의 '기마 자세'에 가까울 정도로 허벅지에 부담이 온다. 그래서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이다


 무게 중심을 낮추면 많은 이점이 생긴다. 일단 이동이 기민해진다. 앞이든 뒤든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든 이미 허벅지에 충분한 힘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언제든 지면을 박차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 상대과 같이 이동해도 내가 먼저 도착한다. 상대를 보고 움직여도, 한 템포 늦게 움직여도 내가 먼저 도착한다. 이것은 상대의 패를 보고 치는 고스톱이나 다름없다.


 거리가 반 보만 떨어져도 상대의 공격이 크게 보인다. 거리와 검의 위치, 각도를 조합해 보면 상대가 찌는 곳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어 시 평소보다 반 발짝만 더 떨어질 수만 있다면 상대의 공격을 가까스로 막아낸 다음 제대로 보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찔러 넣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반격의 성공률이 올라간다.


 공격도 마찬가지다. 상대가 충분히 빠지기 전에 파고 들어간다면 단순한 공격에도 상대를 놀라게 할 수 있다. 낮은 자세에서 파고드는 공격을 잘 사용한다면 세 번, 네 번씩 페인팅을 넣지 않아도 된다. 급격히 가까워지는 거리에 놀란 상대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몇 개 없다. 허우적거리며 막느냐, '에라 모르겠다' 하며 팔을 뻗어 내 검이 먼저 닿기를 바라거나. 거리를 빼앗을 수만 있다면 단순한 찌르기와 작고 빠른 단 한 번의 페인팅만 반복해도 상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자세가 낮으면 공격 실패 이후, 방어 실패 이후 이어지는 2차 행동이 빨라진다. 펜서를 초보자와 고수, 이 둘로 나눈다면 그 경계에 있는 것이 바로 이 2차 행동이다. 1차 행동 이후 바로 자세를 회복해야 추가 공격이든 수비든 도망이든 할 수 있다. 그러려면 항상 낮은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공격을 실패하면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자세가 무너진 채 엉성하게 서있게 된다. 이때 얼른 자세를 회복해야 상대의 반격을 막아낼 수 있는데 자세가 높으면 그게 어렵다. 어린아이들이 뒤뚱거리다 꽈당 넘어지는 것을 생각해보자. 아이들은 키에 비해 머리가 크고 무겁고 발은 작다. 균형을 잡기 힘든 몸매(?)란 소리다. 무게 중심이 위에 있으니 작은 돌부리에도 쉽게 넘어진다. 펜싱도 마찬가지다. 팡트를 쏘고 나면 성공하든 실패하든 무게 중심이 바닥에 가까워야 한다. 기본자세인 앙가드 자세보다 팡트 자세는 더 낮아야 하는데 기본자세부터 허공에 떠 있으니 팡트 이후는 말할 것도 없다. 팡트 이후 비틀거린다면, 팡트 이후 앞다리의 무릎이 충분히 굽혀지지 않았다면 이는 모두 기본자세가 높다는 뜻이다.


 바른 자세는 어렵다. 똑바로 서기, 똑바로 앉기, 똑바로 걷기가 얼마나 어려우면 전문 모델이라는 직업이 따로 있을까? 여기서 '바르다'는 것은 정직하다거나 예쁘고 잘생겼다거나 착하다는 것이 아니다. 주어진 상황에 효과적이라는 뜻일 뿐이다.


 억지로 무게 중심을 낮추기 위해 다리를 과하게 벌리거나 다리를 많이 굽힐 필요는 없다. 그냥 처음 배운 그 자세를 기억하자. 맨 첫날, 첫 시간에 배운 그 자세면 된다. 힘들어도, 다리가 아파도 그 자세를 항상 유지하자. 신경을 쓰지 않아도 항상 바른 자세를 유지할 수 있을 때까지 항상 신경을 쓰면서 수시로 자세를 점검하자. 따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필요(상황)에 따라 숨을 골라 쉬듯이 말이다.


 기본기가 전체의 70%를 차지한다면 그중 65%는 디테일이다. 대충 비슷해 보이는 자세를 취한다고 다 같은 효과를 내는 것이 아니다. 70% 중 65%를 차지한다면 사실상 전부라고 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자세를 낮춰 무게를 아래로 내리자. 그럼 속도가 빨라지고 시야가 넓어지며 공격이 길어질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어제보다 더 많이 이기게 될 것이고 덜 지게 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펜싱 이야기 #16. 기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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