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부 만들기 - 중국의 워싱턴 수용과 변용] 판광저 저
17-18세기 유럽에서 힘깨나 쓰신다는 왕족이나 귀족들 사이에서는 시누와즈리 (Chinoiserie)라는 중국풍의 유행이 휩쓸고 지나갑니다. 화려한 로코코 문화의 최정상에 있던 트렌드 세터들이 너도나도 중국 도자기로 방을 장식하고 중국풍 옷을 입는 것이 패션의 최첨단을 걷던 시대입니다.
대항해시대 이후 유럽-아시아간 항로가 열리고, 비단, 차, 도자기 등 신문물이 배에 실려 유럽에 도착하면서 중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됩니다. 중국산 사치품 들은 요즘으로 비하면 에르메스나 파텍필립 같은 대접을 받았고, 왕족들은 도자기로 방하나를 채우며 부를 과시했습니다.
중국은 단순한 사치품 공급지가 아니라 유럽보다 긴 역사를 가진 문화적, 경제적 강국이었고, 선교사들의 보고를 통해 당시 청나라의 황제였던 강희제가 ‘카톨릭을 믿지 않는다는 것만 제외하면 완벽한 철인군주’라는 소식까지 들리며 당대 유럽의 최고의 지식인들까지 중국을 동경하기 시작합니다.
"중국 예술은 정교하게 완성된 예술이다. 그들의 의례는 베르사유보다 더 정교하고 문명적이다…우리가 읽는 법도 모를 때 중국인들은 이미 4천 년 전부터 우리가 자랑하는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 그들의 문화는 고대 로마 그리스와 비견될 만 하다." - 볼테르
"제후들과 제국의 가장 위대한 사람들이 멀리서는 흠모해 마지않고, 가까이서 대할 때는 존경을 금치 못하는 그 군주가 페르비스트와 함께 내실에서 마치 선생을 모신 학생처럼 날마다 서너 시간씩 수학도구와 책을 통해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이다 ... 그 군주는 자신의 자식들이 과학의 근본 원리와 여러 진리에 대한 지식을 스스로 터득할 수 있게끔 수학에 관한 책을 친히 집필하고자 했다고 한다. 또한 그 군주는 자신의 나라를 밝혀 줄 수 있는 이 지혜가 집안 대대로 전해질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 라이프니츠
물론 이런 중국에 대한 환상은 아편전쟁 이후 실제 중국 땅을 밟아본 유럽인들에 의해 산산히 부서지게 됩니다. 하지만 중국에 대한 환상과 동경은 단순한 무지에 의해 벌어진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인간의 두뇌는 보고 싶은 것을 위주로 보도록 설계되어 있고, 대개의 경우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은 현실의 암울함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 카톨릭교회와 프랑스 정치체계를 비판하는데 인생을 바쳤고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던 볼테르에게 당시 유럽의 현실은 얼마나 암울한 것이었을까요? 당대 최고의 수학자이자 과학자이며 미적분의 발견자인 라이프니츠에게 전쟁에만 신경쓰던 조지 1세가 얼마나 답답했으면 만리 타향의 중국 황제가 학습열이 높다는 점에 대해 칭송하는 글을 썼을까요. 현실이 암울할 수록, 미지의 세계는 미화되기 마련입니다.
시간을 조금 뒤로 돌리면, 중국과 서양의 입장은 완전히 반대가 되게 됩니다. 아편전쟁 이후의 중국은 열강들의 수탈의 대상이 되고, 불평등조약과 전쟁 배상금을 물어내야 하는 청 정부가 세금을 가중시키며 백성들은 신음하게 됩니다. 이러한 암울한 현실속에서, 사람들은 한낮 오랑캐로만 보던 서양이 어떻게 중국을 능가하는 강국이 되게 되었는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에게 서양세계에 대한 지식을 전달해주던 메신저는 선교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작성한 유럽에 대한 여러 이야기는 암울한 현실에 맞춰 중국인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으며, 그중에 특히나 관심이 집중된 사람은 바로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었습니다.
중국인들이 워싱턴에 대해 열광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들의 암울한 현실을 타파할 수 있는 영웅 상과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만주족인 청나라 지배하에서 신음하는 한족들에게 영국의 압제 하에 있던 식민지 미국의 현실은 동질감을 느낄수 있는 환경이었고, 오랑캐를 물러내고 자신들의 나라를 다시 찾아줄 군사적 영웅의 탄생은 모두가 바라 마지 않던 점이니 말입니다.
선교사들이 작성한 문건에 나오는 워싱턴은 이후 스토리를 윤색하여 배포한 중국 작가들에 의해 상당히 미화된 존재로 변신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워싱턴의 이야기는 유교적인 이상에 맞춰 해석되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두번의 대통령 임기를 끝내고는 3선을 포기한 점은 중국의 가장 이상적인 황제 상인 요순시대 현자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준 ‘선양’과 비교되게 되는 식이죠.
그리고 워싱턴을 좀 더 유교적인 ‘철인군주’에 맞춰넣기 위해 스토리를 만들어내기 시작합니다. 영국 군에 맞서 싸울 군대를 이끌어달라는 청을 받았으나 두번세번 거절했고, 결국 국민들이 단체로 읍소를 한 후에야 총 사령관 자리를 받아들였다던지,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갈때 금 1만 5천으로 사례하려 하였으나 일말의 재물도 취하지 않고 돌아갔다던지 하는 식의 전형적인 우상화 작업입니다.
이러다 보니, 중국인의 이상속에서 미화된 워싱턴은 실제 미국인들이 알고 있는 사람과는 매우 다른, 신화적인 인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물론 미국에 가서 실제 워싱턴에 대한 전기를 읽어본 소수의 중국인들이 중국에 돌아와 이런 오해를 걷어내보려 했으나, 현실은 이상만큼 섹시하지 않은 터라 실패하고 잊혀져 버립니다.
워싱턴 우상화에 정점을 찍는 단어가 바로 ‘국부’라는 단어입니다. 미국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지사들을 영어로는 Founding Fathers라고 부릅니다. 워싱턴 외에도 존 애덤스, 토마스 제퍼슨, 제임스 메디슨 같은 초기 대통령들과, 벤저민 프랭클린이나 존 핸콕 같은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군사 지도자로 워싱턴의 중요성은 매우 높지만, 독립운동은 그 혼자서 해낸 일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미국에서는 Founding Fathers 라는 복수형의 단어로 독립운동가들을 지칭하고, 그 중에 한명으로 조지 워싱턴을 소개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어버리면 중국인들이 생각하는 ‘영웅’이나 ‘철인군주’의 의미는 상당히 희석되어 버리게 됩니다. 따라서 중국인들은 ‘국부’라는 단어를 단수로 만들어 버리고 독립을 위한 공헌의 상당수를 워싱턴에게 돌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낸 단어를, 한족의 독립을 위해 그 일생을 희생한 '쑨원'에게 붙여 자신들의 이상을 투여해 냅니다.
실제로 중국 근대사를 공부하다 보면, 중국 혁명에서 쑨원이 수행했던 역할이 미미하다는 점에 놀라게 됩니다. 신해혁명이 터졌을때 쑨원은 미국에 있었고, 급히 귀국해 난징임시정부 대총통에 취임하지만 3개월만에 위안스카이에게 총통 자리를 넘기고 물러나게 됩니다. 이후에도 밀려난 국민당을 키워내기 위해 1차 국공합작까지는 이루어냈지만, 그 결과를 보지 못하고 1925년 사망하게 됩니다. 실적 위주로만 평가를 한다면, 쑨원이 중국의 국부라고 불릴만한 업적을 쌓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습니다.
하지만 살아 생전에 이미 신화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의 스토리는 여러번 포장되고 미화되다 못해 결국 워싱턴에 비교되며 국부라고 불리기 시작합니다. 중국과 대만은 각자 그를 계승했다고 주장하며 우상화를 계속하고 있고, 그의 이미지는 정치적인 프로파간다로 사용되게 됩니다. 이 과정에 대해서는 책에 상세히 서술되어 있으니, 일독을 권하는 바입니다.
판광저의 ‘국부 만들기 - 중국의 워싱턴 수용과 변용’은 암울한 근대 중국의 현실 속에서 조지 워싱턴이라는 외국의 사례가 입에서 입을 타고 미화되는 과정과, 그렇게 완성된 미담이 어떻게 프로파간다로 이용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 하는 책입니다. 일반 대중을 위해서 쓰여진 교양서 보다 역사학도를 대상으로 쓰여진 전문적인 학술서에 가까운 책이지만, 다양한 사료를 소개하며 흥미진진하게 이야기가 전개되어 나가는 장점이 있습니다.
총평은 별 네개 정도. 좀 딱딱하지만 아주 재미있게 읽은 책이라, 추천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