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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ra Days Feb 26. 2024

삶을 라이브공연처럼 멋지게 탐험하는 TCK남매 -1

아프리카 케냐와 짐바브웨에서 자란 Shimblings 건희님&주희님

    그 언젠가 나와 같은 TCK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기로 마음을 먹고 내가 어른이 된 후 만난 TCK들을 떠올려 보았다. 나처럼 아버지의 직장 발령이나 학업으로 해외에서 4-5년 거주한 케이스, 목회자의 자녀, 아예 타국으로 부모님을 따라 이민을 간 사람들, 조기유학으로 혼자 떠난 사람들 등. 여러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중 특히나 인터뷰를 하고 싶었던 몇몇의 분들이 있었고 건희 님은 그중 하나이다. 


건희 님은 나의 첫 회사에서 만났던 동료였다. 당시 팀에 새로이 합류한 인턴이었던 건희 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어떻게 하다 보니 그가 아프리카에서 거주하고 왔다는 것을 알게 되어 놀라웠고 내심 반가웠던 기억이 난다. 다만 부모님이 거주하실 동안 대학교 휴학을 하고 가서 일 년 동안만 아프리카를 겪었던 나와는 달리, 그는 케냐와 짐바브웨에서 인생의 반 이상을 산 “찐”이었다. 짐바브웨는 나 역시도 여행을 했던 곳이라 어느 정도 아는 척을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경험했던 짐바브웨는 철저하게 여행자의 시선으로만 닿을 수 있는 곳이었고, 여행의 기간 역시 짧았기 때문이다.


나는 오랜만에 건희 님에게 연락을 했고, 인터뷰 요청을 하며 한 가지 조건을 조심스레 덧붙였다. 그건 바로 그의 인스타그램에 종종 등장하는 그의 동생, 주희 님을 함께 인터뷰하는 것이었다. 늘 에너지틱한 건희 님의 사진 속 (대부분) 빨간 머리와 밝은 표정으로 등장하는 그의 동생분이 참 궁금했다. 성인이 되어서 남매가 이렇게 가깝게 지내는 것도 신기했지만 사진으로부터 느껴지는 독보적인 아우라가 분명 그 남매의 성장과정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지레짐작을 했다. 그 에너지는 흉내를 내기 어려운,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 긍지와 밝음, 그리고 컬러풀함이었기 때문이다. 


감사하게도 인터뷰를 응해주신 두 분 덕에 이번 기회를 통해 다이내믹한 그들의 성장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던 것뿐만 아니라 내가 사진에서 느꼈던 아프리카의 강렬한 햇살처럼 열정적이고 다이내믹하고 자유로우며 건강한 에너지를 받을 수 있었다. 인터뷰 답변을 정리하며 문장 사이사이의 생동감과 흡입력 덕분 나 역시도 함께 짐바브웨서 유년기를 함께 보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인터뷰를 하면 할수록 나는 두 분의 부모님이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많은 사람들이 이민을 결정하는 이유는 자식에게 더 좋은 환경과 삶을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함이지만, 특히나 견고하면서도 넓은 가치관으로 자녀들이 어려울 수도 있는 타지에서의 생활을 최대한 누리고, 악기 및 외국어 역시 가르쳐 삶을 다방면으로 탐험할 수 있게 해 준 것, 한국과는 많이 다른 사정의 국가에서 안전한 보금자리와 끈끈한 가정을 유지한 것, 세계는 넓고 각자 더 큰 사람으로 자랄 수 있게 심어준 가치관 등이 참 멋지다고 생각이 되었다. 


내가 앞으로 나의 자녀를 어디서 어떻게 키울지는 모르겠으나, 나 역시도 물리적인 장소에 국한되지 않고 나의 건강한 가치관을 잘 세우고 크고 다양한 것들을 잘 담을 수 있는 가정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멋지고 귀한 인터뷰였다.  




Part I. 케냐와 짐바브웨에서의 유년기 & 청소년기 

심건희 님과 심주희 님 

 1. 안녕하세요, 건희 님 & 주희 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우리는 Shimblings입니다! (Shim+siblings) 케냐와 짐바브웨에서 살다 온 Ghun & Joobo라고 합니다. 


건희: 현재 한국에서 무역 플랫폼 회사를 다니고 있는 35살 심건희라고 합니다.

주희: 안녕하세요 저는 “Joobo”라고 불리는 심주희입니다. 저는 32살 직장인입니다.   


2. 두 분 다 굉장히 어린 나이에 케냐로 이주하셨어요. 케냐에 대한 기억이 있는지 궁금해요.   

1994년, 케냐에서 주희 님과 주희 님 어머니

건희: 케냐는 너무 어릴 때 약 3년 정도만 살았기 때문에 많은 기억은 없지만 그때 사진을 보면 가끔씩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어요. 기린에게 먹이를 줬던 것, 초등학생 때 수영을 배웠던 것, 집에서 일하시던 도우미 아주머니와 현지 언어인 스와힐리어로 대화했던 것, 그리고 동아프리카 최대 규모의 항구도시인 몸바사에서 직접 게를 잡았던 기억 등이 있습니다.


주희: 저 역시 케냐에 대한 기억은 많지 않아요. 제가 태어나고 백일잔치를 하자마자 케냐로 이주를 했거든요. 케냐에서 어린이집을 다녔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고, 어린이집 등하원 버스를 “matatu”라고 불렀던 기억이 나요. 부모님이 말하시길 저는 당시 스와힐리어를 현지인처럼 했다고 하는데, 저는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저희 집에서 일했던 도우미 아주머니 피비 (Phoebe), 집, 그리고 이웃 친구들이 아주 살짝 기억납니다.   


3. 일반적으로 많은 분들께 아프리카는 아직 낯선 곳일 것 같아요. 케냐와 짐바브웨에 대해 간략하게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건희: 케냐는 대중에게 저희가 대체적으로 떠올리는 아프리카 초원, 그리고 동물들이 많은 곳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도심에서는 절대 동물을 찾을 수 없고 무조건 동물원을 가거나 국립공원을 직접 방문을 해서 동물들을 볼 수 있습니다. 거주했던 당시 케냐는 정치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매우 불안정한 시기이었기 때문에 저녁에는 절대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어요.


주희: 짐바브웨의 경우 아프리카 남쪽에 위치한 육지에 둘러싸인 국가예요. 대체적으로 짐바브웨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남아프리카공화국 위에 위치해 있다고 설명을 하지요. 하지만 짐바브웨는 그 나라 자체 언어, 문화, 그리고 역사를 가진 독자적인 나라입니다. 짐바브웨는 100년 이상 영국의 식민통치 하에 있었고, 백인만 정치 참여가 가능했으며 (White Minority Rule),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1980년 4월에서야 독립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짐바브웨에 대해서 들어보셨다면, “로버트 무가베"와 “100조 달러"에 대한 이야기 역시 들어보셨을 거예요. 짐바브웨는 오랜 기간 지속된 무가베의 독재 정권 아래에서 심각한 물가상승률을 겪으며, 짐바브웨의 화폐는 전 세계에서 가장 가치가 낮은 화폐로 전락했어요. 저희 가족은 그 기간 내내 짐바브웨에서 살았지요. 그러한 경제, 정치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짐바브웨는 아름다운 기후와 자연, 사람들, 그리고 좋은 교육으로도 유명하답니다.   


4. 저도 짐바브웨를 여행차 한번 가본 적이 있는데, 멋지다 못해 무서운 빅토리아 폭포와 호텔에서 경험한 비싼 물가, 그리고 호텔 근처를 기웃거리며 먹이를 찾는 원숭이 등이 기억에 남아요. 거주하는 입장으로서는 어떤 나라였는지 궁금해요.   


건희: 빅토리아 폭포는 비싼 관광지이긴 하지만 너무 아름다운 곳이죠. 게다가 짐바브웨와 잠비아를 이어주는 다리에서 120미터 번지를 할 수 있는 곳으로도 유명한 곳입니다. 저는 거기서 번지점프를 세 번했답니다. 


저의 인생의 반을 짐바브웨에서 보냈기 때문에 짐바브웨는 저에게 첫 번 째 집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다녔고, 학교 생활이 너무 재밌었어요. 저에게는 좋은 친구들과 귀한 추억들을 많이 쌓고 지금의 활기찬 성격을 만들어준 소중한 곳입니다.


짐바브웨는 전기와 물이 엄청 귀한 국가이기도 합니다. 단전과 단수는 빈번한 일이었어서 미리 물을 받아놓은 물탱크에서 바가지로 샤워하거나 씻는 경우들이 많았고요. 비상 탱크에 있는 물이 바닥나면 아버지가 멤버십을 소유하고 있었던 골프장에 가서 샤워를 하는 날들도 있었습니다. ㅎㅎ 


전기가 없는 날에는 가족끼리 거실에 모여서 촛불 켜고 숙제를 하거나 체스 또는 장기를 두는 날들도 있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성인이 되어 한국에서 자취할 때 전기가 나갔던 경우가 있었는데, 한 시간 만에 다시 복구되어서 동생과 함께 엄청 신기해했던 기억이 납니다!


주희: 짐바브웨는 제 인생에서 가장 중대한 나날들을 보낸 곳이에요.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까지 저는 짐바브웨의 수도인 하라레에서 다녔죠. 저는 짐바브웨인 선생님들의 교육을 받고 그분들의 보살핌을 받았으며, 저의 가장 친한 친구들 역시 그곳에서 만났어요. 짐바브웨는 지금의 저를 만든 곳이고, 저는 언제나 그곳을 “집"으로 여길 거예요. 


짐바브웨에서 사는 것은 분명 어려운 점도 있어요. 앞서 오빠가 말한 것처럼 전기, 물, 휘발유 등이 종종 부족했죠. 간단히 씻는 것을 위해서도 물을 욕조와 바구니에 모아서 했어야 하니까요. 당시 저희 어머니는 화장실 볼 일을 세 번 이상 본 다음에 변기물을 내리는 것을 허락해 주셨어요.  


단전은 정말 빈번한 일이었고, 초를 켜고 숙제를 하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었죠. 그리고 저희가 (종종) 쓸 수 있는 타당한 핑곗거리도 되었어요. “선생님, 어제 전기가 나가서 숙제를 못했어요"라고 말이죠.ㅎㅎ 


휘발유 역시 종종 동이 났기 때문에 휘발유를 얻기 위한 “휘발유 줄" (Petrol Queue) 역시 몇백 미터 길이로 세워져 있었고, 사람들은 휘발유를 얻기 위해 거의 매일 두 시간 이상 줄을 서있기도 했어요. 응급상황이 생겨 경찰이나 119를 불러도 “기름이 없어서" 그들이 못 오는 일들도 생기곤 했죠. 


2008년, 제가 현지에서 고2였을 때 경제침체와 물가상승과 더불어 당시의 대통령 선거는 짐바브웨의 새롭고 무서운 바람을 몰고 왔어요. 폭동과 시위등이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고, 학교들은 모두 한 달 이상 임시 휴교를 했어요. 저희가 살았던 거주지역 (residential complex)에는 바리케이드가 세워졌고, 저는 집 밖으로 잠시라도 나갈 수가 없었어요. 당시 슈퍼마켓에는 우유, 빵을 비롯하여 기본적인 음식이 동이 나서 아버지를 포함한 한인회 아저씨들은 남아프리카공화국까지 운전을 하러 가서 음식을 구해오셨어요. 


아빠는 트럭 가득 빵, 우유, 그리고 다른 음식들을 싣고 돌아오셨고 모두 냉동고로 직행되었어요. 저는 당시 굉장히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있었기에 학교를 갈 수 없단 사실에 매우 화가 나있었고, 동시에 친구들을 보지 못하는 것도 슬펐어요. 


이 모든 것들이 굉장히 부정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동시에 당시의 저에게는 이 것이 제가 알던 “유일한 삶"의 형태였고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이벤트들도 일상적이었어요.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만 해도 인터넷 접속이 원활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친구들과 저는 더욱더 밀접하게 놀 수밖에 없었죠. 저희는 종종 아프리카 남부의 문화인 브라이 (바비큐)를 하기 위해 서로를 초대하거나, 물이나 전기가 있는 친구 집에 가서 씻기도 하고 숙제도 함께 했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부모님이 이런 환경에서 저희를 키우시기 힘드셨겠다 싶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이러한 삶이 제가 알던 유일한 삶이었고 저는 매우 행복하고 순수한 시절을 보낼 수 있었어요. 


크리스마스 기간 동안만 야간 개장을 하는 짐바브웨의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짐바브웨 빅토리아 폭포 놀러 갔을 때 잠비아 국경에서 사촌동생들과


    5. 짐바브웨에서 유년기부터 청소년기까지 모두 보내셨는데, 외국인학교 혹은 현지 학교를 다니 신 건가요? 학생으로서의 경험도 궁금합니다! (현지 언어인 쇼나어를 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건희: 저랑 동생은 현지인 학교를 다녔는데요. 중학교 때까지는 학교에 백인들이 많았는데 제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정부에서 백인들을 국가에서 쫓아내는 사건들이 많았고 그때부터는 학교에서 백인보다는 현지인들이 더 많아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희가 다녔던 학교는 IGCSE (Cambridge) 커리큘럼을 도입했기 때문에 영국식 프로그램을 따랐습니다. 선배를 존중하고 임원들 말을 들으며, 선생님 말을 잘 듣는 문화나 엄격한 교복 역시 영국식이었죠. 방과 후 활동 역시 의무적이었어서, 당시 저희는 거의 하루 종일 학교에 있었어요. 


재미있게도 저랑 동생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모두 다 같은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게다가 고등학교에서 저는 전교 부회장을 맡았고, 동생은 전교 회장을 맡게 되어 당시 저희 학교에서 처음으로 아시안 학생들이 학생 임원들을 맡게 되었어요. 짐바브웨 한인들 사이에서 저희는 엄청난 자랑이었답니다! 


주희: 오빠가 말한 것에 덧붙이자면, 학교가 영국식 시스템을 따르기 때문에 모든 수업은 영어로 진행이 되었어요. 4학년, 5학년 때 쇼나어를 배우는 수업이 있었기에 당시 꽤 잘했던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그 후엔 많이 잊었어요. 저는 중학생 그리고 고등학생 때 제2외국어로 프랑스어를 선택했기에 쇼나는 점점 잊혀져갔죠. 

학교는 당시 저에게 “다른 세계" 같은 느낌이었어요. 저희 부모님은 집에서 한국어를 쓰는 것에 있어서 엄격하셨고, 어렸을 때부터 저희는 집에서 한국어만 쓸 수 있었어요. 학교에서는 영어만, 집에서는 한국어만 쓸 수 있었죠. 매일매일 저는 두 가지의 페르소나를 살고 있는 느낌이었어요. 


제가 초등학생 때는 저의 다름으로 인해 한동안 괴롭힘도 당했기에 “한국인 페르소나"를 최대한 숨기려고 노력했어요. 하지만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 진학 후 더 국제적인 경험을 쌓은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고 저를 있는 그대로 더 받아들여주는 로컬 친구들 역시 만났어요. 그 당시 저는 한국 음식과 문화를 친구들과 공유하는 것이 너무 좋았어요. 아마 중학생 때 저는 저의 정체성에 있어 조금의 자신감을 얻게 된 것 같아요. 

친구들을 모두 집으로 초대하여 열었던 생일파티 (개를 들고 있는 주희 님, 멋있는 척(?)을 하고 있는 건희 님)
고1 마지막 날, 고2 때부터 새로운 교복을 입게 되어 롤링페이퍼처럼 교복에 낙서를 하는 문화가 있었다

 

    6. 현재 짐바브웨에 남아계신 가족분이나, 연락이 닿는 분이 있으신가요? 현재의 짐바브웨 모습은 어떤 모습인지 궁금해요.

  

주희: 부모님, 그리고 함께 있었던 친척들은 이제 다 한국에 살고 있어요. 당시 친했던 친구들과 친구들의 가족 역시 많이 짐바브웨를 떠났고, 현재 짐바브웨에 살고 있는 친구 1-2명 정도와 연락을 주고받고 있는데요. 제가 짐바브웨를 떠난 이후에는 그렇게 큰 변화는 없는 것 같아요. 


저희 부모님은 2017년 로버트 무가베의 37년 정권의 끝을 내는 쿠데타 바로 직전에 모든 것을 다 팔고 짐바브웨를 떠나기로 결심하셨어요. 저희의 다른 친척분들은 코로나19가 터지고 어렵게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죠. 


현재의 짐바브웨의 물가 상승은 더 심해졌고, 빈곤율 역시 두배로 늘어났으며 사람들은 구직난을 겪고 있어요. 또한 하루에 20시간에 달하는 단전을 겪고 있기도 하죠. 이러한 뉴스를 들으면 참 마음이 아프지만, 저는 짐바브웨가 다시 예전처럼 빛날 수 있을 거라 믿고 저 역시도 언젠가는 방문하고 싶어요.  


7. 두 분은 자라며 중간에 한국을 오고 가셨나요? (예를 들면 방학 때 등) 성장기에 ‘한국'은 건희 님과 주희 님께 어떤 의미였는지 궁금해요!   


건희: 한국에 자주 오진 않았지만 짐바브웨에서도 부모님이 한국어를 사용하는 데 있어 엄격하게 교육을 시켜주셨어요. 자주 오진 않아도, 와야 할 이유가 있어서 올 때마다 항상 빠르게 변화는 문화를 따라가는 것은 힘들었고 워낙 피부가 까만 편이다 보니까 사람들이 외국인으로 보는 경우들도 있었습니다. 제일 좋았던 것은 롯데월드 같은 곳을 평일에 갈 수 있었기에 마음껏 편하게 다 경험해 볼 수 있었던 것이었어요. 또한 음악을 워낙 좋아했기 때문에 한국에 있는 사촌들이 테이프 또는 CD들에 한국 음악을 담아서 보내주기도 했었고, 유명한 한국 영화와 드라마들을 DVD로 가져와서  짐바브웨에서 보는 재미도 있었습니다.


주희: 짐바브웨가 워낙 멀어 자주 오고 가진 못했지만, 할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여를 못해 49재에 참여를 하거나 병원 검진을 위해 오곤 했었어요. 제가 아기 때 한국을 떠난 후 다섯 번째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대학 입시를 위한 시험을 치르고 인터뷰를 하기 위해 왔었어요. 


저에게 한국은 늘 이상하리만큼 꿈같은 곳이었어요. 제가 첫 번째로 눈이 내리는 것을 본 나라기도 했고, 매서운 추위를 경험한 곳이기도 했죠. 할머니댁 주변에서 적은 용돈으로 군것질도 사 먹고, 비디오테이프나 만화책 역시 빌릴 수 있었어요. 짐바브웨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죠. 


서울에 있는 친척들 집을 방문하고 롯데월드에 간 것은 어린 주희 (Joobo)의 한국에서의 경험 중 최고의 경험이었어요. 제가 가본 곳 중 가장 환상적인 곳이었어요! 


어떤 냄새를 맡으면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 느낌을 아시나요? 저는 한국에서 슬슬 겨울이 올 때 맡게 되는 냄새 중 한 냄새만 맡으면 그렇게 예전에 한국을 방문하고 할머니 댁에 묵을 때가 기억이 나요. 전 그걸 “한국 냄새"라고 불러요. 확실히 어떤 냄새인지 형용하긴 어려운데, 한국의 겨울은 저에게 후각적으로 추억을 떠올리게 해주는 특별함이 있었어요. 



건희 님, 주희 님의 한국에서의 삶은 Part 2에서 이어집니다. 

삶을 라이브공연처럼 멋지게 탐험하는 TCK남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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