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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열음 Jul 15. 2024

시작하는 마음

승진을 했다. 나이에 비해 빠른, 전례 없던 승진을 도와준 꽤 높은 임원 둘이 우리 집에 찾아왔다. 엄마는 밤 열두시가 넘도록 이어지는 그들의 술자리에 안주를 대느라 주방에서 계속 서 있었고, 중간중간 그들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가서 말했다. 민주 승진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드시고 싶은 것 있음 말씀하세요. 새벽 한 시. 새벽 두 시. 세 시가 지나도록 술자리가 이어졌다. 이제 가셔야죠 본부장님, 늦었어요 몸 상하시겠어요. 그런 걱정은 민주 매니저가 할 게 아니야 이렇게 좋은 날 우리 같이 마셔야지, 결국 새벽 여섯시에 설정된 내 휴대폰 알람이 울리고 나서야 그 자리는 끝이 났다. 꿈에서 깨 눈을 떠보니 아침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전교 임원 선거에 나간 적이 있다. 그것은 엄마와의 거래였다. 학교에서는 3박 4일간 떠나는 수련회를 3개월 앞두고 수요 조사를 했다. 민주야 수련회 가서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혹시 사고라도 나면. 무슨 소리야 엄마, 애들 다 가고 선생님도 가는데. 우리 반 애들 다 가는데 나만 빠지라고? 민주야, 대신 너 수련회 안 가면 원하는 거 엄마가 들어줄게.

 

끝까지 수련회에 간다고 밀어붙일까 생각하던 그 순간 머리에 떠오른 건 바로 ‘전교 부회장 선거’ 였다. 엄마 나 전교 부회장 나가게 해줘. 무엇을 사달라거나 어디 보내 달라는 것도 아니고 부회장 선거에 나가게 해달라는 나의 요구. 학급 입원이야 삼사 학년 때 한두 번 정도 해봤지만 전교 임원은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삼사십 명 되는 반이 아니라 4학년에서 6학년 대상으로 거의 천명에 가까운 학생들을 상대로 선거 활동을 해야 했고 당선이 됐다고 끝이 아니었다. 전교 임원이 된 아이를 둔 부모들은 학교의 온갖 행사에 불려 다녀야 했고 찬조라는 명목의 돈을 내야 할 일이 많았다. 당시 열두 살이던 내가 이런 일들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며 종종 술을 먹는 엄마가 이 일들을 잘 해내리라는 확신은 더더욱 없었다. 하지만 운동회같은 행사 때 강단에 서던 전교 임원단들의 모습, 다른 아이들이 다 하교한 후 ‘전교 임원단 회의’라고 써 붙인 교실 문 안에서 열띤 토론을 하던 그들의 모습을 나도 한 번은 가져보고 싶었다.

 

부회장 되면 엄마도 할 일이 무척 많다는데 엄마가 해줄 수 있겠어? 학부모 모임도 있을 거고. 그런데 엄마는 술만 먹으면 인사불성이 되잖아.

너는 꼭 그렇게 말하더라, 엄마 믿어봐. 약속한 건 어떻게든 지킬 테니까. 한번 해볼게.

 

후보 등록 기간을 하루 남기고 급하게 지원서를 써냈다. 내가 지원한 5학년 여자 부회장은 나와 함께 옆 반 여자 아이까지 두 명이 후보 등록을 했다. 지원서를 낸 아이들은 그날 교무실로 가 선거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당시 6학년 담임을 맡고 있던 선생님이 말했다. 전교 임원은 총 5명이야. 알고 있지? 5학년 남녀 부회장, 6학년 남녀 부회장, 6학년 회장. 장차 학교를 이끌 전교 임원 선거. 너희도 긴장되니? 다음 주는 너희에게 힘든 시간이 될 수도 있어. 조금 빠듯하겠지만 월요일까지 ‘출마의 변’을 전지에다 써와야 해. 종이 우측에는 너희 얼굴이 잘 나온 사진, 큰 사이즈의 증명사진이면 좋겠네. 그 사진을 붙이고 그 아래에는 자기소개랑 너희가 임원단이 되고 만들고 싶은 학교에 대해 쓰면 되. 전지는 학교 정문 앞 소식지 란에 붙일 예정이야. 화, 수, 목 삼 일간 선거활동이 진행될 거야. 금요일은 선거 디데이. 그 때까지 화이팅이다.

 

학생이 즐거운 학교를 만들겠습니다.

안전하고 즐거운 우리 학교.

재밌고 행복한 학교를 우리 손으로.

 

지금 보면 진부하고 뻔한 말들이었으나, 그때는 이 문장들을 하나 쓰려고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른다.내가 쓰고 엄마가 검수한 연습장에 쓰인 출마의 변을 전지에 옮겨 쓰는데 길이가 일 미터 넘는 전지에서 글씨는 자꾸만 기울어지고 작아졌다. 서너 장을 버리고 유성 매직 냄새에 머리가 아프기 시작할 때 즈음 엄마가 오십센티 미터 자를 들고 왔다. 민주야 잠시만. 엄마는 바닥 장판 위에 놓인 종이 위에 무릎을 대고 엎드려 자에 대고 선을 긋기 시작했다. 횡으로 희미하게 그은 줄은 일정 했고, 그 줄을 종이 다 채운 엄마는 일어나며 말했다. 아유 이런 것도 오랜만에 하려니 팔 아프다 얘, 딸 때문에 이런 것도 해보네. 나는 엄마가 그린 그 연필선을 위 아래로 두고 그 안에 글씨를 채워 넣었다. 마지막으로 엄마는 본인이 그은 연필 선을 얇은 종이가 찢기지 않도록 정성스럽게 지우개로 지웠다. 완성된 전지는 꽤 그럴 듯했다. 월요일 아침 학교에 오자마자 완성한 종이를 교무실에 제출했는데 하교할 때 보니 학교 소식지 게시판에는 나와 최새론이라는 아이의 종이가 ‘전교 부회장 후보란’ 칸에 나란히 붙어있었다. 평소에도 주름진 스커트에 흰 스타킹과 까만 애나멜 구두를 신고 다니는 아이였다. 그 아이의 종이에는 하얀 블라우스를 입고서 가슴 밑까지 찍은 큰 사이즈의 세련된 증명사진이 붙어있었다. 그 옆에는 우리 집 마당의 활짝 핀 분홍색 철쭉 옆에서 캐릭터가 그려진 초록색 티셔츠를 입고 개구진 자세를 하고 있는 내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선거 활동은 등교 시간인 8시부터 9시까지, 쉬는 시간 틈틈이, 그리고 하교 시간에 이뤄졌다. <기호 2번 한민주> <즐거운 학교를 만들자>라는 글자가 적힌 팻말을 친구들과 들고 다니며 인사를 했다. 같은 반 아이들 서넛과 다른 반에 흩어져 있는, 알고 지내던 아이들 대여섯이 모여 선거 활동을 도와주었다. 쉬는 시간마다 친구들은 마치 자기 가족이 국회의원 선거라도 나가는 양 팻말을 들고 내 이름을 부르며 복도를 쏘다녔고, 종종 ‘기호 1번 최새론’이라는 팻말을 든 아이들과 자그마한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친구들은 이 기간 동안 학교가 끝나면 우리집으로 왔다. 야 최새론 팻말 봤어? 색종이로 이름을 잘라 붙이니까 눈에 엄청 띄더라? 아이들은 우리집에서 배를 대고 엎드려 선거 활동에 필요한 포스터나 팻말을 손보았다. 엄마도 이 기간만큼은 술을 먹지 않았다. 꿈에서 승진을 도와준 임원들에게 계속 안주를 내왔듯 모인 아이들을 위해 주방에 서서 뭘 자꾸만 만들었다. 마트에서 사온 닭다리살을 튀김가루에 묻혀 가라아게를 튀기고 냉동실에 있던 떡국떡을 찬물에 담근 다음 케챱과 고추장을 반반씩 넣은 떡볶이를 만들어주었다. 아줌마가 한 게 저희 엄마 거 보다 맛있어요! 라고 말하는 아이들에게 엄마는 웃어보이며 많이 먹으라고 답했다.

 

선거 날, 학교 강당에는 뉴스에서 보던 것처럼 제법 정식으로 만들어 놓은, 사면이 다 면으로 가려진 기표소 3개가 있었다. 떨렸다. 천을 들추고 들어가니 책상 위에는 모나미 펜대와 인주가 놓여 있었다. 펜대 머리에 벌건 인주를 찍어 내 이름 옆의 빈칸에 갖다 댄 후 자기가 자기를 뽑아도 되는 건가? 라는 고민을 아주 잠깐 했다. 그리고 손에 힘을 주어 펜대를 빈칸에 꾸욱 눌렀다. 그러자 내 이름 옆에는 빨간색의 작은 육각형 모양이 찍혔다. 얼마 뒤 개표가 완료되었다고 했다. 대기실에 있던 후보자들이 강당으로 모였고 나는 5학년 전교 부회장에 당선이 되었다. 곧바로 내 옆에 있던 최새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선생님의 말이 끝나고 그 아이는 큰 보폭으로 가장 먼저 강당을 나섰다.

 

전교 부회장이라는 타이틀은 어린 나에게 일종의 자부심과 특권 의식을 심어줬다. 마치 반에서 선생님의 편애를 받는 학생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학교 이름으로 하는 기부와 봉사활동에 참여했고, 운동회 같은 행사에서는 전교 임원들에게 먼저 순서지와 팀 배분과 같은 정보가 전해졌다. 수업을 하고 있으면 종종 앞문이 열리고 ‘전교 부회장 한민주, 잠깐 교무실로’라고 6학년 회장 언니가 불러 교무실로 호출될 때도 있었다. 격주마다 있는 전교 임원 회의에서는 임원단 언니, 오빠들과 함께 학교 안건에 대해 토의를 했는데 그럴 때 느꼈던 내가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그 기분이 좋았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나와 관계 맺고 있는 대단해 보이는 사람들이 마치 나인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임원단의 부모 역할은 생각보다 물질적 시간적인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이었다. 학교에서 기부하는 물품도 그 부모들이 돈을 모아 산 것이고, 하교 후의 임원단 회의에 우리가 먹는 간식 또한 부모들이 돌아가며 준비했다. 학교에 무슨 일이 있을 때, 보수 공사를 하거나 새 나무를 심어야 하는 일이 있을 때면 가장 먼저 그들이 나서서 돈을 모금하거나 해결 방법을 찾았다. 회의가 있는 날이면 다른 임원 엄마들도 함께 모였는데 아줌마들은 내게 번갈아 가며 물었다. 민주야, 엄마 많이 바쁘시니? 통 연락이 되지 않으셔서. 엄마에게 이날 좀 오시라고 전해줄래? 그럴 때 나는 엄마가 바쁘셔서요. 엄마에게 말씀은 드려볼게요. 라는 말로 둘러댔다. 사실은 ‘엄마가 또 술을 먹기 시작해서 며칠 동안 집에 안 들어오고 있어요’ 라든지 ‘집에 있긴 한데 술에 취해서 제정신이 아니에요’ 라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거짓말쟁이가 되었다.

 

다른 엄마들이 회의 때 먹으라고 사온 간식들. 햄버거와 땅콩크림빵과 소보루빵, 팩에 든 오렌지 주스가 어느 순간부터는 목구멍에 잘 넘어가지 않았다. 전교 부회장을 해놓고 엄마가 학교도 오지 않는데 이것들을 넙죽 먹는 건 어린 내가 볼 때도 염치가 없어 보였다. 임원단 회의 때도, 학교 행사에 전교 임원들이 모이는 시간에도 나는 점점 말 수를 잃었다. 엄마가 미웠다. 엄마를 믿으라는 말만 믿고 부회장에 나가 덜컥 당선이 되어 매번 엄마 어디 계시니 바쁘시니, 라는 말을 듣는 내 자신도 덩달아 미웠다. 더군다나 내게는 엄마를 믿지 않을 수 있는 기회가 없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내게는 이미 시작만 해놓고 마무리를 하지 못하는 엄마의 과거 데이터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엄마가 눈높이랑 구몬 중에 고민을 많이 했거든. 눈높이가 좀더 사고력에 좋다더라.

 

초등학교 1학년 때 엄마는 방문 수업 선생님을 데려왔다. 그때 나는 엄마와 뒤채에서 둘이 지내고 있었다. 아직 잔열이 남아 후덥지근한 오후에 선생님이 오실 때가 되면 엄마는 니스칠을 해서 반질거리는 붉은색의 교자상을 안방에다 놓고 정성스럽게 행주로 닦았다. 막 닦은 상의 표면은 반들거렸고 나무와 본드냄새가 났다. 그 위에는 적갈색의 결명자차를 따른 유리잔 두 잔을 엄마가 가느다란 코바늘로 뜨개질한 컵 받침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면 잠시 뒤 무릎까지 내려오는 치마를 입고 살색 스타킹을 신은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왔어요, 안녕 민주야. 목소리는 좀 작았지만 차분한 선생님을 나는 좋아했다. 게다가 자주 집중이 흐트러지는 여덟 살 아이를 위해 준비해 오던 자두맛 사탕도 수업의 재미라면 재미였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선생님의 방문 수업에는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방문 수업을 신청한 엄마는 늘 그랬던 것처럼 술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면 뒤채에서 술을 사다 하염없이 마시고 취한 채 혼잣말을 하다 잠에 들었다. 수학, 국어, 과학. 엄마가 세 과목이나 신청한 바람에 내가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 해야 할 숙제는 열 장이 넘었다. 술에 취한 엄마는 숙제를 봐줄 수 없었고 혼자 숙제를 챙기기에 어렸던 나는 자주 숙제가 밀린 채로 선생님을 만났다. 더군다나 엄마가 취해 있었기 때문에 뒤채에서 수업을 하지 못할 때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지내는 일층 거실에서 수업을 해야 했다. 그곳은 엄마와 나의 안방처럼 아늑한 공간이 아니었다. 화초로 둘러 쌓인 거실 한 복판, 평소에 잘 앉지 않아 깨끗하게 관리되지 않은 그 거실에서 할머니는 엄마 대신 상을 내오고 음료수를 내왔다. 할머니가 내온 까만 상은 행주질을 하긴 했으나 문제를 풀다 보면 허옇고 끈적한 먼지들이 눌러 붙은 모서리가 보였다. 나는 그 지저분한 모서리가 너무 부끄러워서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다. 선생님이 그곳을 보지 않기를 애타게 바라다보면 수업 시간이 끝나 있었다. 때때로 엄마는 취해서 교습비를 밀렸다. 저 할머님, 이번 달 민주 교습비가 납부가 안 되어서요. 그러면 할머니는 당황한 표정으로 방에 걸린 바지에서 만 원짜리 지폐를 몇 개 꺼내 선생님께 건넸다. 그리고 나는 내게 자두맛 사탕을 주던, 내가 푼 문제를 빨간 색연필로 채점을 해주던 작은 목소리의 눈높이 선생님을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책상 위에는 A4용지 크기 반의 학습지가, 내가 채우지 못한 문제의 답들이 빈칸으로 남겨 진 채 올려져 있었다.

 

수련회를 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전교부회장을 하게 된 나는 웃기게도 결국 3박 4일의 수련회에 가게 되었다. 엄마가 나를 전교 임원을 시켜서라도 막고 싶었던 그 수련회. 그것을 얼마 앞두고 모처럼 술에서 깨어나 제정신인 엄마가 나를 불렀다.

 

민주야 사실 나나 네 외삼촌이나 네 외할머니가 소풍이나 여행을 못 가게 한 탓에 가본 적이 거의 없었어. 돈이 없어서는 아니고 할머니가 자식들이 다른 곳에 가는 걸 무서워했거든. 어느 정도 였냐면 엄마가 소풍을 갈 때면 기어코 따라와서 점심시간 맞춰서 엄마 도시락이랑 선생님들 먹을 것을 머리에 이고 찾아왔었어. 따뜻한 밥을 먹이고 싶었대. 그러면 친구들 표정이 어땠는지 아니? 유난이다 유난, 하면서 엄마를 흘겨봤지. 엄마 소원은 제발 식은 도시락을 먹는 거였어. 소풍이나 여행을 앞두고는 허락해주지 않을까봐 두렵고 할머니랑 늘 싸웠는데 엄마가 그걸 너한테 그대로 하고 있네. 나는 자식 낳으면 네 할머니처럼 그러지 말아야지, 소풍이든 여행이든 보내줘야지 했는데 너한테 그걸 똑같이 하고 있더라 엄마가. 부회장 하는 대가로 수련회 가지 말라고 했던 거 취소야. 수련회 가. 엄마가 그동안 부회장 시켜놓고 학교 안 간 것도 미안해, 이제는 정말 잘 할게, 술도 안 마시고, 잘 해볼게.

 

결국 나는 전교 부회장도 하고 수련회도 가게 되었다. 모두 내가 이긴 게임이었으나 즐겁지 않았다. 이제는 정말 잘 한다는, 술을 안 마신다는 엄마는 그 이후에도 학교에 온 적이 없었다. 엄마는 여전히 술을 마셨고 나는 학교에서 엄마가 언제 오시냐는 말을 부회장 임기 일년 내내 들어야 했다.

 

오늘 아침 여섯 시 알람 소리를 듣고 깨어난 후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그래서 그 많은 설거지, 새벽 내내 안주를 만들고 내오느라 생겼을 그 설거지는 누가 했을까’ 였다. 시작은 했어도 끝을 내지 못하는 엄마. 꿈에서 깨어 샤워를 하는 와중에도 설거지해야 할 그릇들이 싱크대 개수대에 쌓여 있는 것만 같았다.

 

엄마가 데려온 햄스터가 결국에는 오랫동안 갈아주지 않은 톱밥 사이에서 죽었을 때, 매주 기다리던 선생님과의 방문수업이 예고 없이 끊기고, 전교 부회장이 된 후 엄마를 찾는 아줌마들의 물음 앞에서. 당장 맞닥뜨린 상실감과 난감함에 가려진 채 내가 보지 못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믿고 싶지만 믿을 수 없는 양육자를 가진 내가 평생 마음 속에 키워 온 원망과 미움으로 감싸져 보지 못했던 엄마의 시작하는 마음을 이제서야 나는 겨우 본다. 방문수업을 준비하며 엄마가 끓이던 결명자의 뜨거운 냄새, 행주로 닦은 교자상 위에 남아있던 작은 물기들, 방금 튀긴 뜨거운 치킨 가라아게와 전지 위에 연필로 흐릿하게 그어져 있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선과 간격. 난감함과 곤란함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것들을. 유지하고 마무리할 능력 없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내게 주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제서야 나는 엄마의 시작하는 마음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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