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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nnotyoon Mar 23. 2023

부엌에서 발아래를 한 번씩 보게 되는 이유

 너와 나의 자잘하고 소중한 행복


  오늘은 오랜만에 당근 라페를 만들었다.

  바닥에 떨어진 껍질은 주워서 버렸고, 너무 작게 남은 조각은 내가 먹었다. 발아래를 딱 한 번 쳐다보았다.


  걔는 먹을걸 참 좋아했다. 손바닥에 털어준 가루약마저 맛있게 먹을 만큼 식성이 좋고, 식탐도 많았다. 이모 집에 살 때 시도한 자율배식은 하루 만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날 걔는 밥그릇에 부어 둔 하루치 사료를 한 번에 다 먹고 불쌍한 얼굴로 하루 종일 집을 배회했다. 그 뒤로 아무도 자율배식에 대해 다시 이야기하지 않았다.

 

주말마다 만들던 야채 퓨레

  걔는 신장이 안 좋았다. 의사 선생님은 나이가 많아 그런 거라고 하셨다. 다행히 잘 맞는 약을 처방받았지만, 식단 조절도 중요했다. 그 뒤로 고기 대신 야채나 과일을 먹었다. 뭐든 가리지 않고 먹어서 걱정은 없었다. 밥을 먹을 때도 사과나 오이, 토마토 같은 것들을 잘라주거나 야채 퓨레를 만들어 섞어줬다. 걔가 아침 먹을 시간이 되면 나는 안경도 안 쓴 채로 계단에서 급히 내려와 야채를 잘랐다. 잠이 덜 깨고 눈이 안 보여도 어떤 의무감과, 이렇게 하지 않으면 걔가 화를 낼거라는 약간의 두려움(?) 때문에 필사적으로 그 일을 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게 걔와 나 사이의 암묵적인 동거 조건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ㅋㅋㅋ



  한 번은 바빠서 사료랑 오이만 준 적이 있는데, 다 먹고 나서 밥그릇을 코로 엎고 잔뜩 못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다른 건 왜 없냐는 뜻이었다. 그걸 옆에서 지켜보던 친구는 기가 막혀했는데 나는 하던 일을 제쳐두고 허겁지겁 토마토랑 사과를 잘라 걔 입에 넣어 주었다. 걔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보란듯이 패드에 올라가 쉬도 잘하고, 방바닥에 등을 비비다가 잠에 들었다. 친구는 나한테 가스라이팅을 당했다고 했다. 어쩔 수 없지 뭐.


먹을 게 없으면 점점 뾰족해지던 눈

  걔는 칼질 소리만 들리면 발아래로 와서 고개를 들고 제 몫을 기다렸다. 내가 양파를 썰고 있든, 고추를 썰고 있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면 나는 걔의 반짝이는 눈동자에 못 이겨 걔가 먹을 수 있는 걸 어떻게든 찾아줬다. 가끔 걔가 먹을 수 없는 게 바닥에 떨어지면 그때부터는 전쟁이 시작된다. 나는 다리를 뻗을 수 있을 만큼 뻗어 그걸 못 먹게 하려고 하고, 걔는 그걸 어떻게든 입에 넣으려고 하고. 나는 소리를 지르고 걔는 침을 흘리며 달려오고. 그러다가 넘어지고 책상에 부딪히고 멍이 들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 모든 시간은 걔와 나의 자잘하고 소중한 행복을 위한 거였다.

  걔가 과일 조각을 입에 넣고 ‘아삭아삭’ 씹는 소리가 기분 좋았다. 사과를 씹으면 과즙이 내 다리에 살짝 튀는 것도, 대충 씹어서 삼키려는 웃긴 입 모양도 좋았다. 수염에 물기가 묻은 얼굴이 귀여웠다. 내가 몇 분의 시간을 들이면 어떤 존재를 그렇게 기쁘게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리고 그것마저 가끔은 귀찮아하는 게 미안했다. 토마토 한 알, 사과 한 조각이 걔에겐 완벽한 행복일 수도 있었을 텐데.


간식에 집중한 눈코입

  걔가 떠나고 얼마간은 부엌에 설 때마다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요리를 하면서 발아래를 봐도 야채를 먹으려고 기다리는 존재가 없었다. 초콜릿이 떨어져서 달려가도 초콜릿은 떨어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장을 볼 때 오이나 토마토를 더 사지 않았고 주말마다 야채 퓨레를 만드는 것도 그만두었다. 물론 아침에 잠이 덜 깬 얼굴로 걔의 아침을 챙기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됐다.


  그래도 진짜 진짜 만약에, 정말 만약이라는 게 있다면, 나는 그 귀찮은 일들을 평생 한다고 해도 너를 다시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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