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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xx Nov 21. 2019

당신과 나의 이야기 82년생 김지영

오랜만에 영화를 보러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82년생 김지영>이 10월에 개봉한 걸 생각하면 꽤 늦은 영화감상이었다. 

다양성영화들은 금방 내리거나 아예 극장에서 상영을 하지 않는 동네에 사는 탓에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서울로 나가야 하지만 <82년생 김지영>은 아직 우리 동네에도 꽤 많은 시간대를 차지하며 상영을 지속하고 있었다. 대기업이 배급사인 게 좋은 경우가 개봉한 지 꽤 오래되도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영화관에 들어가기 전 로비에서 입장을 기다리는데 옆에 모녀가 앉아있었다. 어머니로 보이는 분의 전화통화를 들으니 따님의 강력한 제안으로 함께 영화를 보러 오게 된 것 같았다. 기다리는 나도 엄마 생각이 났다. 둘이 같이 봤다면 어땠을까.


당신과 나의 이야기

이 영화는 단지 김지영이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나와 어머니와 할머니의 이야기이고 또 그리고 어쩌면 정말 싫지만 내 딸의 이야기가 될 수 도 있다.

이 정도면 여자들 살기 좋은 세상이지 라는 말은 어렸을 적부터 지금까지 듣고 있는 말이다. 이 글을 보고 있는 누군가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여자가 살기 좋아진 것이란 여자도 투표를 할 수 있고 여자도 학교를 다닐 수 있고 여자도 취업을 할 수 있다 는 것일까. 정말 이것만으로 여자들이 살기 좋아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당신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이 영화는 이렇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지영은 명절에 시댁에 가서 일을 한다. 남편이 주방으로 와 '도와'준다며 하는 설거지를 말리며 시댁의 눈치를 본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시댁의 주방에는 지영 혼자서 일을 하고 있다.

-지영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아이를 돌본다. 식사 준비, 설거지, 아이 등 하원, 씻기기, 빨래 쉴 틈 없이 일하며 잠깐 나와 벤치에 앉아 마시는 커피 한 모금에 '맘충'소리를 듣는다.

-다니던 회사의 친했던 동료는 육아와 살림을 하는 지영은 '왕비'이며 자신은 평생 일만 하는 무수리라고 한다.

-지영은 회사에서 장기 프로젝트 팀에서 제외되었다. '장기'프로젝트를 한다면 아무래도 결혼, 출산, 육아 때문에 여자들은 오래 일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영은 다니던 회사의 여자화장실에 불법 촬영사건이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이와 친정을 가던 중 들른 공중화장실을 바로 이용하지 못하고 공포에 떤다.

-지영은 회사에 복직할 기회를 얻고 남편은 육아휴직을 고민한다. 그리고 시어머니는 얼마 벌지도 못하는 돈으로 남편 경력을 끊지 말라며 화를 내고 지영은 복직을 단념한다.


지영은 말한다. 

지금의 삶 속에 때로는 행복하지만 어딘가에 갇혀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성차별은 유구한 역사를 타고 지영의 삶 속을 장악한다. 3남매 중 막내가 아들인 지영이네 가족계획은 우연이 아니며 지영과 언니 선영이 숟가락과 젓가락을 놓을 동안 막내 동생은 사탕을 먹고 있는 것을 아무도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부터 지영의 인생은 갇혀버리기 시작한다. 아니 오빠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미싱을 돌려야 했던 지영의 엄마 삶에서부터 시작됐을 지도.


남편 대현은 아이를 낳자고 말하며 많이 '도와'주겠다 한다.

본인 집에서 설거지와 음식 준비를 하고 있는 지영을 '도와'주겠다며 싱크대 앞에 서며 

아들이 하나 더 있어서 며느리를 한 명 더 봤다면 어머니의 고생을 덜어드렸을 텐데라고 말하고, 

육아휴직을 하겠다며 이 참에 책도 읽고 공부도 하겠다며 '쉬면 좋지'라고 말하는 남편은 

식사 준비 동안 숟가락과 젓가락을 놓는 역할은 당연히 누나라고 생각했던 지영의 남동생과 같다.


지영은 혼자서는 헤어 나올 수 도 없는 곳에 갇혀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나와 당신의 삶은

그렇지만 지영의 갇혀버린 삶 속에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들은 있다. 

기혼에 자녀가 있는 직장의 팀장님이 그랬고, 스토킹 당하던 지영의 뒤를 따라 내려준 이름 모를 사람이 그랬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라는 엄마가 그랬다. 영화의 결말은 원작과는 다르게 지영이 병원을 다니고, 쓰고 싶었던 글을 쓰며 자신을 회복해가는 방향으로 희망을 내포한다. 

영화를 보고 난 관람객의 평은 두 가지로 갈린다. 


아직도 저렇게 사는 여자가 어디 있어? 

저렇게 사는 거는 평균 이상의 여자 삶 아니야?


이렇게 두 가지의 의견이 갈린다는 것은 이 영화가 지극히 평균적이라는 것을 대변한다고 한다. 


우리는 인종차별의 문제에서 백인도 다른 인종들 만큼 힘들게 살아간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우리는 장애인 차별 문제에서 비장애인이 장애인만큼 차별을 받고 살아간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소수자의 차별 문제에 대해서 소수자적 위치에 있는 사람이 문제를 제기하고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한다면 다수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적어도 소수자들이 외치는 그 자리에서만큼은 소수자만큼 다수자들도 힘들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좀 더 우위에 있는 사람이 취해야 할 기본적인 자세이다. 소수자들보다 알게모르게 가진 특권을 내려놓아야 하는 순간들인것이다. 경험하지 못한 것이라고 없는 것 취급해버리는 근시안적인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이영화를 보면서도 많이 속상했고 이 영화의 논란에 대해서도 많이 속상했다.

이 영화를 봤던 모든 사람들이 자신 주변에 있는 여자들의 삶은 어땠을까를 생각해준다면 아마 좀 더 (이런 말 하기 거창하지만) 나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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