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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소이 Oct 22. 2021

카메라를 구입한 이유

   나는 처음으로 수동 카메라를 장만했다. 값이 제법 나가는 카메라였다. 네가 무슨 작가고? 남편은 쓴소리를 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틈만 나면 어딜 나갈 때, 카메라를 어깨에 걸머메고 셔터를 눌렀다. 잘 찍히든 안 찍히든 상관하지 않았다. 눈에 들어오는 장면은 오랫동안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찍었다. 그렇게 모아진 사진이 무려 오천 장에 이르렀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사진을 인화하지 않았다. 오로지 USB 안에 신줏단지처럼 모셔져 있을 뿐, 사진은 빛을 보지 못했다. 

  여섯 살배기 아들은 ADHD(주의력결핍장애) 증후군을 갖고 있었다. 바람이 을씨년스럽게 불던 가을날, 정신과에서 아들의 심리검사 결과를 알려주었다.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다른 모습이 유별나다고만 여겼다. 차분하지 못하고 호기심이 많아 이것저것 만져봐야 직성이 풀리는 활동적인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들은 사회성이 떨어졌다. 또래 아이들 틈에 어울리지 못하고 매일 혼자 놀았다. 같이 놀고 싶어도 소통이 되지 않았다. 그 해 겨울부터 아들은 심리치료를 받았다. 주의력결핍증후군은 유전의 요인이 강하다고 했다. 아들의 모습이 어릴 적 내 모습과 똑같다며 친정엄마는 혀를 내둘렀다.

“말도 마라. 너 키우기 힘들었다. 무슨 여자 애가 그렇게 드셌는지 몰라. 고집은 또 얼마나 셌는데.”

친정엄마는 입버릇처럼 그 말을 뱉어냈다. 나는 살짝 웃어넘겼지만, 그 말은 오랫동안 내 귓가에서 맴돌았다.

  사실 카메라를 구입한 이유는 내 유년시절의 장소를 찾아가고픈 바람에서 시작되었다. 삼십 년 전, 내가 자라고 뛰어논 동네는 어땠을까? 어떻게 변했을까? 또래 아이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아들을 보고 있자니 어린 시절 내 모습이 그려졌다. 나는 친구가 없었다. 따돌림은 물론 자존감마저 낮아서 또래들과 어울리길 꺼렸다. 그 모습이 슬픈 그림처럼 나타났다. 그때 그 소녀가 울고 아파했던 장소, 그곳으로 찾아가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벚꽃이 활짝 핀 4월, 나는 내가 나고 자란 고향으로 달려갔다.

  병풍처럼 펼쳐진 성거산이 ㄷ자모 양으로 천흥리를 감쌌다. 사계절 내내 초록빛이 변치 않았던 성거 저수지, 어스름이 질 때까지 마을로 내려오지 않고 놀았던 방죽, 예나 지금이나 저수지는 물빛이 맑았다. 고요하면서도 산새 소리만 간간이 들려왔던 솔숲은 이제 그 자리에 없었다. 그 자리에는 주택들이 즐비하게 산허리를 떠받치고 있었다. 저수지 아랫마을에는 천흥사와 당간지주가 마을의 보물이었다. 솟대처럼 하늘을 향해 곧추 세워진 당간지주는 유년시절 코흘리개 꼬마들에게 인기 장소였다. 말뚝박이 놀이와 숨바꼭질을 하며 해질 때까지 단발머리 소녀가 거기 있었다. 피부는 새카맣게 탔어도 탑을 돌 듯 당간 주지 옆을 돌며 외로움과 쓸쓸함을 잊으려 한 소녀가 측은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저수지 위에서 흘러 내려온 개천은 어린이들과 엄마들이 수다 떨기 좋은 모임 장소였다. 빨래를 빠는 엄마의 방망이질 소리에 남자아이들은 돌 틈을 기웃거리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가재와 물고기가 망태 속에 그득했고, 날은 오렌지 빛깔을 내뿜었다. 그러나 그 개울가는 이제 온데간데없었다. 지금은 마을 진입로 공사로 작은 도랑만이 그 개울이 있었음을 증명했다. 멀리 SKC 공장에서 흰 연기가 산발한 여인처럼 뿜어져 나왔다. 개발과 산업화로 이제 천흥리는 더 이상 시골이 아니었다. 아파트가 들어섰고 상가가 즐비했다. 여름이면 상큼한 포도향이 동네를 휘감았는데, 이제 포도밭은 손에 꼽힐 만큼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곳에서 포장되지 않은 흙길 위를 팔짝팔짝 뛰는 소녀를 꿈꿨다. 그러나 어디에도 아이들의 모습은 없었다. 카메라 셔터를 눌러도 보이는 건 집과 간간히 나타나는 노인들뿐이었다. 적요하리만치 삭막한 분위기로 내가 마치 이방인이 된 기분이었다. 고향은 그만큼 변화되었다. 나는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로 발길을 돌렸다.

  닭장처럼 다닥다닥 붙은 아파트 단지는 시멘트 냄새가 강했다. 사람들은 규칙대로 움직이고 분주하게 살아간다. 정해진 자리와 규격화된 장소, 말은 시끄럽게 떠들 수도 없다. 사람들이 거니는 거리마다 보도블록이 그물망처럼 얽혀 있다. 아이들은 놀이터에서만 뛰어놀고, 학원과 학교를 밥 먹듯 드나든다. 그게 도시가 만든 시스템이자, 틀이었다. 나는 천흥리에서 놀고 싶었던 대로 자유롭게 오르고 내리던 마을과 산이 사무치게 보고팠다. 어쩌면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나는 그 시절을 꿈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현재 내 아들이 얽히고설킨 이 도시에서 계속 자란다면 정체성을 잃은 어른으로 자랄 것 같다. 그건 공포감이었다. 아이의 기질을 인정함과 동시에 고향에서 돌아와 얻은 깨달음은 시골로 가야겠다는 마음이었다. 편안함과 안락함을 추구하는 도시보다 자연 속에서 느리지만, 마음껏 아이답게 성장할 수 있도록 내가 엄마 역할을 잘해야겠다는 확신이었다.

  나는 며칠 전 부동산에 연락을 했다. 땅이 나오면 연락해 달라고 했다. 이제 내가 카메라를 메고 찍을 곳이 명확해졌다. 도시가 아닌 시골이 눈에 들어온다. 흙을 밟고 숲이 우거진 산을 찾아 나서는 일, 그게 이제 내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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