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추석 연휴에는 여행을 다녀왔다. 명절에는 가족과 모여 시간을 보내는 게 당연했는데, 한의원 운영을 시작하면서부터는 남편과 둘이서 온전히 쉬고 놀 수 있는 날이 몇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과감히 추석 연휴 기간 동안 여행을 계획하고 가족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여행지는 호주 시드니. 오래간만에 해외를 나가고 싶은데 이왕이면 서양 쪽이었으면 했고, 시차가 작아서(한국과 딱 1시간 차이) 서양 국가들 중에서는 그나마 체력적인 부담이 덜하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가기 전까지도 너무 바빠서 비행기 티켓을 끊고, 숙소를 잡는 것 외에는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못하고 무작정 떠났다.
여행을 다니며 보고 들은 것도 많지만 그런 후기야 검색만 해봐도 넘쳐나니 나는 여행을 다니며 했던 생각들 위주로 감상을 남기고 싶다.
1. 더 넓은 세상이 있다는 걸 잊지 말자.
호텔에 앉아 하버브리지와 오페라 하우스가 펼쳐진 넓은 풍경을 가만히 보고 있는데, 문득 '그래... 세상이 이렇게 넓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간 왜 이리 불안에 떨고 아등바등 지냈나 하는 후회 비슷한 감정이 밀려왔다. 한의원에, 한국의 집값에, 암울한 미래에 생각을 꽁꽁 동여매고 있었구나. 좁은 생각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책도 다양하게 읽고, 영화도 많이 보고, 여행도 다니며 새로운 시도를 자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2. 환상과 현실이 교차되던 순간.
하루는 태국식 음식점을 찾아가 식사를 했다. 마침 옆 테이블도 한국인이었는데, 낯선 외국 땅이라 그런지 유난히도 대화가 잘 들렸다. 들어보니 워킹 홀리데이로 호주에 온 지 얼마 안 된 친구들이었고, 각자 일자리를 잡은 후 처음 모인 모양이었다. 오늘이 추석인 줄도 몰랐다는 이야기, 인스타그램을 보다가 명절인 걸 알았고, 그러고 나니 괜히 더 쓸쓸했다는 이야기, 이런 식당 와볼 시간도 없었다는 이야기, 저녁이면 지쳐서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울 때도 많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시드니의 반짝이는 모습만 보다가 환상과 현실이 교차되던 순간이었다. 그렇지, 이곳에도 현실이 있겠지. 여유가 넘쳐 보였던 이곳도 현실은 생각보다 치열하고 팍팍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주요 관광지에서 조금만 벗어나 봐도 동네 느낌이 많이 달라졌었더랬다.
아차! 하던 그 순간의 느낌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한국이 아니라면 무작정 더 살기 좋을거라고만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한국에 돌아와서도 팍팍한 현실 옆을 조금만 벗어나면 멋진 환상이 존재한다는 걸 잊지 않고 싶어서. 현실 속에서도 얼마든지 반짝이는 것들을 발견하며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놓치지 않고 싶어서.
3.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시드니로 떠나기 이틀 전부터 벼락치기 공부라도 하듯 유튜브를 찾아보며 이런 곳이 있구나 하고 관광 명소나 식당, 카페들을 눈에 발랐다. 갈 수 있었던 곳을 몰라서 못 가는 게 싫었다. 그리고는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열심히도 돌아다녔다. 사실 난 여유를 만끽하고 싶어 이곳에 온 건데 말이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내가 여기까지 와서도 왜 이러고 있지? 그러고 보니 내 안에서 자꾸만 이런 질타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한의원도 닫아 놓고 이 먼데까지 와서 고작 이것밖에 못 보고 간다고? 시드니에 왔는데 이 정도는 들려야 하는 거 아니니?"
내 안에서 이렇게 내게 질타하고 타박하는 존재가 있다는 걸 최근 알게 됐는데, 그게 심지어 놀 때도 나오고 있는 줄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본전을 뽑아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이것밖에 못 노는(?) 나를 누군가는 한심하게 볼 것 같다는 두려움이 거기에 있었다.
그때 마음먹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는 단 한순간이라도 감동을 느꼈다면 이미 본전 이상 찾은 거라고. 최대한 천천히 눈에, 귀에, 코에, 피부에 많이 담고 느끼고 즐겨보자고. 한 군데도 빠짐없이 돌아다니느라 체력이고 마음이고 다 소진해 버린 게 진짜 본전도 못 건진 여행이라고.
명절에 해외에 나와본 것도 처음이었고, 이렇게 계획 없이 다녀본 여행도 처음이었다. 낯선 경험들이 평소와 다른 생각을 해볼 수 있게 도와준 것 같다. 이 맛에 여행을 떠나나 보다. 앞으로 내 인생엔 또 어떤 여행이 펼쳐질까. 일상 속에 지치고 여유를 잊을 때마다 시드니에서의 하루를 떠올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