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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 Dec 28. 2024

연말연시

어른의 글쓰기

한의원을 개원하고 두 번째 연말을 보내고 있다. 사실 첫 번째 연말에는 개원한 지 3개월 남짓 됐을 무렵이라 연말이란 느낌보다는 그 자리에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시간을 보냈다. 작년과 달리 올해 연말은 멈추고, 바꾸고, 재정비하는 시간이다.


24년 하반기에 개인적인 일들을 겪으며 몸도, 마음도 지쳐있었다. 처음엔 지쳐가는 줄도 몰랐는데 달라지는 내 몸과 마음을 자각하기 시작한 건 12월 초쯤이었다. 어느 날 아침 깨달았다. 아침을 맞이하는 게 지옥같이 느껴지고 있다는 걸.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일도, 책도, 글도, 노는 것도, 쉬는 것도.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그냥 사라지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럴 때면 가장 무서운 건 평생 이런 기분으로 살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다. 조금이나마 힘이 생겼을 때 할 수 있었던 건 '아니야. 절대 이 기분은 영원하지 않아. 가만히 두고 보면 아주 천천히 바뀌어 있을 거니까.'하고 스스로를 토닥이는 일이었다. 감사하게도 한 달이라는 시간에 걸쳐 내 마음은 조금씩 일상으로 돌아오고 있다.




정신을 차렸을 땐 한의원도, 집도 다 만신창이가 되어있는 것 같았다. 일단 쉼이 필요하다는 걸 절실히 느꼈다. 실은 내가 쉴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 많았다. 남들은 이렇게도 한다는데, 남들은 저렇게까지 한다는데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아프고 나서야 알았다. 남이사 어떻든, 내가 당장 죽겠다는데, 내가 나한테라도 쉴 자격을 줘야 하는 게 아닐까. 몸도, 마음도 모두 바닥을 치고 나서야 나는 바뀔 수 있었다.


토요일 진료 시간을 줄이고,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은 아예 쉬어가기로 결정했다. 환자들의 반응이 어떨지 아직은 두렵다. 하지만 평생 일만 하며 사는 게 내 삶의 목적은 아니었으니 반드시 틈을 내는 연습을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이 바로 그럴 때고 말이다.  


집도 하나씩 정리를 시작했다. 침대 위도, 거실 책상도, 냉장고도 모든 게 엉망이지만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해보기로 했다. 오랜만에 이불을 다시 갰고, 책상 위 어질러져 있던 물건들에게 제 자리를 찾아줬다. 책상이라도 정리하고 나니 이렇게 뭐라도 써보겠다는 마음이 생긴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1달 여를 방치했더니 그간 미루고 하지 않았덜 일부터 새롭게 생기는 해야 할 일들까지. 조금씩 의욕이 생기니 할 일들이 더 눈에 잘 들어오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앞서가려는 마음을 애써 달래고 달래 본다. 절대로 숨이 차게 뛰어가진 않겠다 마음먹는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나를 돌보고 챙기는 연습을 더 많이 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하기 싫어도 의무감에 하고 있었던 일들이 아주 많다는 걸 알았다. 아마도 내게는 하고 싶은 걸 하는 것보다도 하기 싫은 걸 하지 않는 게 더 시급한 일인가 보다. 그동안에는 '그냥 하기 싫어서'는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없었는데, 하기 싫어서 하지 않을 자유를 느끼다 보면 언젠가는 하고 싶은 것들도 해볼 수 있는 힘이 생기리라 믿는다.


사주팔자 같은 건 잘 믿지 않는 편인데, 올해까지가 삼재였다는 말이 그 어느 때보다도 위로가 된다. 2024년 묵은해를 잘 보내주고 2025년은 나에게 집중하는, 나와 더 친해지는 한 해로 꾸려보고 싶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새해라고 새로운 다짐을 하는 일이 없었는데 오랜만에 새해 다짐을 적어보니 꼭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다. 매일 뜨고 지는 해지만 이번 연말연시엔 새로 뜨는 해가 괜스레 더 특별해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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