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에는 한의원 이름이나 정확한 위치가 쓰여있지 않았지만 글을 읽자마자 이곳이 어디인지 구체적으로 그려졌다. 주변 아파트 세대수, 인프라, 한의원의 구조나 환경을 글로만 읽었는데도 말이다. 오래 살았던 동네인 데다 온 가족이 함께 다니던 곳이었으니까.
고등학생 때 내가 한의대를 목표로 한다고 하니까 친구 한 명이 OO한의원에 한 번 가보라고 알려줬다. 거기가 과학 선생님 아내 분께서 하시는 곳이라면서.
평소 두통을 달고 살았던 나는 수능이 끝나고 나서부터 한의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수줍은 마음으로 복자여고를 나왔고 대전대 한의예과에 붙었다고 고백했을 때 한껏 들뜬 선생님의 표정이 아직도 선명하다.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새 친구들도 사귀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바빠 금세 잊고 지냈지만.
3년쯤 지났을까, 한방신경정신과 첫 시간이었다. 교수님은 출석 체크를 하시다 내 이름을 호명하시고는 반갑게 인사하셨다. "잘 지냈어요? 더 예뻐진 것 같은데. 나 못 알아보는 가봐요? 수업 시간 동안 한 번 잘 생각해 봐요."
OO한의원 원장님이시구나! 강의가 끝나자마자 강단 앞으로 가 교수님께 다시 인사를 드리고 오랜만의 안부를 나눴다.
"엄마가 한의원에 계속 오셨거든. 오실 때마다 네가 어떻게 지내나, 요즘 무슨 공부를 하나 안부를 물었지. 그리고 네가 n학년이 되는 게 몇 년 뒤인가 표시해 놨고, 이렇게 출석을 부르는 날만 기다렸어."
그렇게 작은 인연도 소중히 여겨주신 은사님 덕분에 졸업 후까지 관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지금의 한의원은 은사님께서 처음 개원하신 곳이고, 두 아이를 낳고 쉬게 되면서 다른 원장님께서 운영하고계셨다. 그걸 3번째 원장으로 내가 이어받게 된 것이고.
내 이름을 걸고 첫 출근을 하던 날, 제일 처음 한 일은 엄마 이름이 적힌 차트를 찾는 것이었다. 지금은 전자차트를 쓰지만 은사님께서 처음 개원했을 땐 종이 차트를 쓰셨기 때문에 엄마가 건강했을 때의 기록이 남아있었다.
사람들이 다 빠져나간 빈 한의원에서 조용히 엄마의 차트를 보는데 마음이 괜히 뭉클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엄마가 이어준 인연이 나를 이 한의원으로 이끌어준 것만 같아서. 엄마의 이름이 적힌 차트와 은사님의 필체로 쓰인 기록을 보면서 철없는 내가 까맣게 잊고 있던 동안에도 관계를 소중히 연결해 준 어른들의 마음을 떠올렸다.
어쩌면 이곳과의 연은 환자와 의사로 은사님과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을지도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