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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종현 Mar 28. 2022

죽음이 있어 다행이야


언제가 길을 걷다 물었다.

"만약에 죽음을 선택해야 한다면, 언제를 기준으로 삼는 게 좋을까?"

요즘 죽음에 대한 생각을 부쩍 자주 한다.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조금 준비된 상태'에서 죽길 바라는 마음이랄까? 계획이랄까? 그런 쪽에 더 가깝다. 

내 옆에서 조용히 길을 걸어 오피스로 향하던 이는 이렇게 말한다. 

"글쎄, 어려운 질문인데..."

"그냥 '언제까지 살고 싶다'와 '그렇게까지는 살고 싶지 않다'라는 두 가지 질문을 던져본다면 어때?"

"그래도 모르겠어..."

"그럼 내가 물어볼게. 다리에 힘이 빠져서 제대로 걷지 못하고 보행 도움기가 있어야만 걸을 수 있는 상태라면?"

"그 정도를 가지고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군."

근거리에는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스테인리스 보행기에 의지해 아주 천천히 길을 걸어가는 노신사가 보였다. 

내가 다시 레벨을 상향해 물었다.

"그럼... 똥을 싸도 힘이 없어 니 엉덩이조차 닦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오 세상에! 그때가 된다면 제발 날 죽여줘..."

나도 비슷한 생각이다. 만약 내 뒷일 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힘이 없을 지경이 된다면 주변인에게 늘 미안한 부탁을 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하고 싶다. 혹은 너무 늙어서 미안한 마음이나 부끄러움조차 없는 지경이 될까?

문제는 이렇게 죽음을 선택하는 게 여기 스웨덴에서도 여전히 불법이라는 것이다. 아주 소박하게 희망한다. 내가 그 나이에 도달하기 전에 해당 법이 국회를 가뿐히 통과하길 말이다. 그건 인권에 해당하지 않는가 모르겠다.

나는 대답했다. 

"걱정 마. 그때가 오면 내가 널 꼬~옥~ 반/드/시/ 죽여줄게."

잠시 생각에 잠기느라 뜸을 들이다가 다시 말했다.

"근데 어떻게 죽여줘야 하지?"

약간 사이코패스 같은 질문이었다. 후에 생각해 보니 말이다. 그런데 나는 가끔 내가 사이코패스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범죄로 발전되지는 않지만 일상에 숨어있는 수준 낮은 사이코패스가 아닐까 의심해 본다.

물론 때가 닥치면 나의 굳은 결심도 봄날인지 모르고 내린 눈처럼 녹아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생각과 계획은 미리미리 해두는 게 좋지 않나? 그럼 당황하지 않을 수 있으니. 

물론 또 이런 생각도 들었다. 만약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이가 그럴 처지에 놓인다면. 그 똥 내가 치워줄 테니 죽여달라는 말은 제발 하지 말라고 내가 매달리지 않을까?  


가끔 친구와 죽음 후에는 무엇이 있을까?에 대해 말하다 보면, 대등하게 두 갈래로 생각이 나뉜다. 사후가 있길 희망하는 집단과 사후에 아무 것도 없길 희망하는 집단이 그렇다. 나는 후자에 속한다. 물론 과학적으로도 후자가 훨씬 논리 정연하다고 굳게 믿고 있다. 사후에 지저분하게 지옥이나 천국이니 이런 장소가 있다고 하거나 인간의 영혼이 귀천을 떠도는 것보다는, 차라리 깔끔 질서 정연하게 아무것도 없었으면 좋겠다. 그게 더 낫지 않나? 이런 내 생각에 많이 이들이 이렇게 말한다.

"아니, 그럼 너무 끔찍하지 않아요? 아무런 기억도 남지 않고 모두 사라지는데 너무 슬프지 않나요?"

그럼 내가 대답한다.

"이 사람 말 참 못 알아듣네. 이보세요. 아무것도 없다니까요. 그런 생각이나 느낌조차 없는 상태란 말이오."

나는 분명 적어도 소시오패스인 것이 분명해 보인다.


죽음이 있어 다행이다. 죽음으로써 우르는 누군가의 잘못을 용서하고, 그리워하고 조금 더 잘해 주지 못한 것을 뒤늦게 후회한다. 예술가의 죽음은 작품의 가치를 올린다. 누군가의 죽음은 알지도 못한 채 우리에게 잊혀진다. 누군가에게 잊혀진다는 건 최고의 형벌이라는 누군가의 말에 난 동의할 수 없다. 시간이 지나 잊혀진다는 것보다 훌륭한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회사에 다닐 때 너무 싫어하던 부장님이 한 분 있었다. 세상에 이런 불통 대통령 같은 분이  한 부서를 책임지지고 있어서 말단 대리의 입장에서 얼마나 가슴이 답답했는지 모른다. 내 자리에서 고개를 돌리면 그 부장님의 뒤통수가 밝게 빛나는 모니터를 배경으로 보이곤 했는데, 그 모습이 정말 아직도 각인이 되어 있을 정도로 몸서리가 처진다.   

퇴사를 한 후에 진심으로 그 부장님을 찾아가 그때는 왜 그렇게 모질었는지 되묻고 따지고 싶을 지경이었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냐고 고래고래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런데 그분이 얼마 전에 암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지난 동료에게서 전해 들었다. 주변인이나 직장 동료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몰래 퇴사를 한 뒤에 병원에서 홀로 치료를 받다가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소식을 전하는 이는 아주 쓸쓸한 죽음이었을 것이라고 첨언을 했다. 

그렇게 꼭 한번 찾아뵙고 따지자고 마음먹었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대상을 상실해버리고 말았으니 당연하다. 죽음은 참 간편하게도 사람을 용서하게 만든다. 그 죽음이라는 게 뭔지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관대하게 잘못을 용서하게 된다. 사실 미움의 대상이 상실되고도 용서를 하지 못한다면 우리네 삶은 더 골치가 아파진다. 어쩌면 용서가 나의 정신건강을 위해 좋은 일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미워할 대상이 없어졌으니 말이다. 그 일은 이제 묻어두고 잊어버리는 게 낫지 않나?라고 나의 뇌가 알아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자식이 없다. 그래서 내 부모님은 늘 걱정을 하신다. 자식이 없는 자식의 노년이 외로울까봐가 주된 이유다.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자식이 없기에 내 노년이 상대적으로 더 외로울 것이라 생각하다. 다만 난 고양이 한 마리를 입양하는데도 엄청난 책임감에 짓눌려 포기하기에 작은 인간의 생명체를 감당해낼 용기가 내겐 없다. 

어느 날 문득 자식도 없는데 재산은 모아서 뭐하나 싶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려줄 사람도 없는데 말이다. 그런데 웃픈 사실은 그럴 재산도 현재 없는 놈이 별 걱정을 사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재산이 너무 많은데 물려줄 자식이 없는 상황이 생긴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얼토당토않은 가정을 해본다. 어느 정도 나이가 된다면 가지고 있는 은식기, 골드바, 다이아몬드 링, 주식, 부동산 (물론 이런 것이 내게 있을 리가  만무하지만...) 등은 대부분 처분하고, 그 돈을 막 써야겠다는 계획에 도달하게 되었다. 아마도 주로 비싼 여행을 가는데 대부분의 돈을 쓸 것 같다. 막판 인생을 제대로 즐겨야겠다는 게 계획의 요지다. 

문제는 언제 죽을지 알 수가 없으니 재산을 너무 많이 써도 안되고 너무 많이 쌓아놔도 안된다. 자식이 없으니 별 걱정을 다하게 된다. 자식이 있다면, 쓸 만큼 쓰고 못 쓴 돈은 알아서 자식들이 가져갈 것이기에 내 죽음 뒤에 남을 돈이 남에게 들어가게 되는 걱정은 없다.

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자식을 가지는 건 자유시장경제에 아주 도움이 된다. 물려줄 자식이 있기에 사람들은 열심히 일해 돈을 모으지 않는가? 그래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자식을 가지라는 압력에 시달리는 게 아닐까? 간단한 예로, 자식이 있는 사람은 통제하기가 쉽다. 사회는 자식을 불모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애가 없는 젊은 대리급들이 천방지축으로 날뛰다가, 아이가 생긴 과장급이 되면서 고분고분해지는 건 자식을 책임지려는 젊은 부모의 고민이 담긴 합리적인 선택이다. 그러나 자식이 없는 사람은 여전히 천방지축이다. 통제가 상대적으로 어렵다. 애를 낳아야 비로소 철이 든다는 건, 길들여졌다는 의미다. 길들여졌다는 의미는 누군가에게 통제를 당하고 있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애를 낳아서 기르라고 한다. 아이를 불모로 삼아 열심히 일을 시키려는 의도가 숨어있다. 물론 종족의 번식이 주된 목적이겠지만 말이다.

조금 슬픈 이야기지만, 내 친구 중에 한 명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아니 이런 얼굴로 태어나게 했을 거라면 차라리 낫지를 말지. 왜 낳아서 여자한테 인기도 없이 서글픈 젊음을 보내게 만드는 거야?"

그런데 자신의 못난 얼굴을 탓하던 친구는 결혼을 해서 아이를 둘이나 나았다. 그럼 그 아이들은 또 어쩌란 말인가? 자신의 DNA가 열성이라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왜 열심히 아이를 가지는 걸까? (이 이유도 내가 아이를 가지길 꺼려하는 이유다.)


세대가 바뀌었음을 분명하게 해 주는 것도 죽음이다. 만약 사람이 죽지 않고 계속 살아간다면 고집 센 노인들이 자신의 경험이 더 많고 그로 인해 얻은 지혜도 많다,라고 주장하며 고집을 부리는 시간이 아주 영원히 늘어날 것이다. 그럼 나이가 어린 세대와 끊임없이 갈등하게 될 게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도 죽임이 있는 것이 다행이다. 

나이가 들면 선입견이 생긴다. 선입견이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축적해온 일종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와도 같다. 축적된 많은 양의 데이터를 통해 우리는 미래의 일을 결정하게 된다. 그렇기에 경험이 많은 사람은 상대적으로 위험한 선택을 할 가능성이 적다. 그와 동시에 편협된 편견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만약 사람이 죽지 않고 계속 살아간다면 우리는 점점 쌓이는 데이터를 통해 아주 좁은 선택만 하게 될 것이고, 나와 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와는 대화조차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회가 좋을까? 반대로 젊은 세대는 축적된 데이터가 없기에 이리저리 부딪히며 자신만의 경험을 쌓는다. 그걸 통해 우리는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맞이한다. 


오래된 세대의 죽음을 통해 다가오는 세대는 새로운 가치를 세울 것이고, 또한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통해 우리는 발전한다. 죽음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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