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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종현 Aug 01. 2022

도와달라는 말, 믿을 수 있어?

영화 <스퀘어>의 질문들

칸느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2번이나 받은 스웨덴의 젊은 영화감독 루벤 외스트룬드(Ruben Östlund)의 영화, 스퀘어를 최근 본 적이 있다. 이 영화는 2017년에 루벤에게 첫 번째 깐느 황금종려상을 안겨준 영화다. 그는 올 해, 5년 만에 다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황금종려상을 받았음에도 의외로 한국에 알려지지 않아 조금 놀라운데, 영화를 본 일부 사람들의 평가도 너무 혹독하다. <너무 지루한 영화>, 혹은 <스토리가 없는 영화>라는 평이 많을 정도로 나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상당히 스마트하게 우리들의 삶을 비튼다. 늘 생각은 해왔지만 그렇게 심도 있게 다가가진 않았던 질문들에 대해 묵직하게 다가간다. 그것도 아주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그렇게 평가절하를 할 영화가 아니다. 


당신이 깨어있는 이 시대의 지식인이고 믿는가? 

그럼 이 영화를 통해 철저히 무너져 보자.


당신이 타인의 삶을 포용할 정도로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를 지지한다고 믿는가? 

그럼 이 영화를 통해 다시 생각해 보자.


영화의 주인공, 크리스티안의 바로 우리의 갈팡질팡하는 모습이다. 

 


크리스티안은 오늘날의 우리 모습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 크리스티안은 덴마크인으로 스웨덴 스톡홀름 미술관에서 수석 큐레이터로 일하는 인물이다. 키도 크고 잘생겼다. 말도 유려하게 잘하고 경제적으로 성공한 그런 인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영화를 단순히 한 엘리트의 가식적이고 이중적인 삶의 태도를 비난한다. 혹은 진보 좌파의 진실된 더러운 속내를 까발린 영화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타인의 모습을 비판할 정도로 나 자신은 그렇게 따뜻하고 정의로운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면 그건 거짓말이지 않은가? 혹은 자신을 너무 사랑하는 정신병자일테다. 

영화 속 주인공, 크리스티안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이자 '당신'의 모습이다. 


[영화 속 주인공, 크리스티안]


영화에는 탄탄한 스토리 라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주인공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이 얽히면서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상당히 불편하고 불쾌하지만 계속 지켜보게 만드는 흡입력 있는 영화다. 또한 웃기면서도 그저 웃어넘길 수는 없는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영화가 던지는 수많은 질문 중에 몇 가지를 소개한다.


1. 도와달라는 말, 진실일까?


영화에 꾸준히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가 도움(help)이다. 출근길에 어떤 남성에게 협박을 당해 쫓기는 여자가 도와 달라고 외치고, 상점 앞에서 집시들이 구걸하고 있다.  

<도와주세요!>

우리는 이런 말을 늘 듣는다. 길을 가다가 길을 묻는 사람부터 시작되는 이런 사소한 도움부터, 전쟁을 피해 타국 먼 길을 달려온 난민까지... 도와달라고 외치는 사람들은 주변에서 항상 늘 있어 왔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도움에 다 응하는가? 절대 아니다. 왜 도움에 적극 응하지 않을까? 당신이 나쁜 사람이라서? 나말고는 무관심해서? 혹은 당장 내 코가 석자라 경제적으로도 마음적으로도 여유가 안되어서? 우리가 타인의 절박한 상황에 무관심한 이유는 무얼까? 


그런데 영화는 살짝 비틀어서 말한다. 

<그 도움의 외침은 진실일까?>

 

출근길에 도와달라고 비명을 지르며 쫓기던 젊은 여성을 도왔지만, 알고 보니 그녀는 쫓아오는 남자 갱과 한 팀인 소매치기범이었다. 배가 고프다고 동전 한 닢이라고 달라고 구걸하던 세븐일레븐 편의점의 한 집시 중년 여인은 현금이 없다는 크리스티안의 말에 그럼 샌드위치라도 하나 사달라고 말한다. 아주 무례한 표정으로 그리고 양파는 빼서 주문하라고 명령조로 말한다. 이에 짜증이 난 크리스티안은 샌드위치를 사서 건네지만 양파는 알아서 빼서 먹으라고 말한다. 그걸 받아 든 집시 여인은 병신 같은 새끼라고 욕을 한다.

그렇다 우리는 도움을 요청하는 수많은 외침 중에서 헷갈리고 있다. 누군가는 도움이라는 말을 통해 우리를 이용해 먹기도 하고, 우리의 뒤통수를 치기도 한다. 진정된 도움을 줄 수 없는 이유는 도움의 진실성을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는 늘 도움을 요청하는 주변 인물들 사이에서 크리스티안의 모습을 보여준다. 도아줄까 말까? 갈팡질팡 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우리는 비판할 수가 없다. 바로 우리가 크리스티안이기 때문이다. 


2. 누가 누굴 돕나?


도움이란 주기도 하고 때론 받기도 한다. 사회적 위치가 아무리 높더라고 혹은 아무리 부자라도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 영화는 그 장면을 넣으면서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급한 업무로 딸을 만나기 위한 장소를 잠시 떠나야 할 순간, 그가 도움을 요청한 사람은 다름 아닌 구걸하는 집시 남자였다. 평소 업신여기고 사회의 불필요한 악이라도 보듯 대우한 그다. 백화점에서 우아하게 쇼핑하던 사람들은 모두 크리스티안의 요청을 거절한다. 그를 도울 오직 한 사람은 백화점 입구에서 두 손을 들고 바짝 엎드린 집시 남성이 마지막 사람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아침 출근길 쫓기던 여성을 도왔지만, 그녀가 훔쳐간 지갑과 핸드폰이 없어지자 버스를 탈 수도 없었던 그가 전화 한 통을 빌려 쓰자고 길가는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모두 거절당한다. 

가짜로 도움을 요청한 여성을 도았지만, 정작 자신이 진짜로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오자 그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 빠진 크리스티안, 우리는 웃고 넘길 수만 있을까? 

영화는 이런 식의 사소한 스토리들을 통해 우리를 웃게 만드는 동시에 생각의 거리를 던져준다. 


3. 어떻게 믿어? 


영화가 이야기는 많은 메시지 중 하나가, '내가 어떻게 믿지?'이다. 우리는 어떤 사건의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기 어렵다. 

크리스티안은 상대방을 믿지 못한다. 물론 그는 말로는 인권을 존중하고 다양성을 존중한다고 외치는 우리 시대의 깨어있는 엘리트이지만 정작 자신의 주변인도 믿지 못한다. 

한 기자와 원나잇을 하고 사용한 콘돔을 대신 버려주겠다는 여성의 제안도 믿지 못한다. 여성이 자신의 정액을 사용해 임신이라도 하면 어쩔 것인가?라는 의심이 생겨나기 시작한 크리스티안은 끝까지 콘돔을 사수한다. 두 사람 사이 악력에서 늘어지는 콘돔의 모습을 보고 우리는 웃지만 평소 우리가 말하지 못했던 모습을 영화는 희화화하고 있는 셈이다.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을 믿을까? 나와 원나잇을 한 상대를 믿을 수 있을까? 저 게토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믿을 수 있을까? 내 밑에서 일하는 사람을 믿을 수 있을까? 

그 믿음의 불확실성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4. 타이밍 

모든 것은 적절한 타이밍이 필요하다. 도움을 주는 것도 때를 놓치면 우리는 누군가를 진정으로 도와줄 수없다. 

영화는 스톡홀름 최고급 호텔 만찬장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아주 극도의 긴장감으로 그려놓고 있다. 사회 상위 계층이 초대된 저녁 만찬장에 크리스티안이 주도한 예술행위가 진행된다. 아티스트는 고릴라를 흉내는 행위를 보이는데, 이는 문명화와 비문명화 사이에서의 충돌을 그려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아티스트가 너무 극도로 몰입하는 바람에 폭력에 가까운 상황들이 벌어지고만다. 젊은 여성은 고릴라 흉내를 내는 아티스트에게 강간을 당할 위기에 놓였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를 돕지 않는다. 

어쩌면 만찬장의 우아한 고위층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고릴라야 나에게만 오지 마라. 그럼 괜찮아! 다른 곳에 가서 엉망으로 놀아라.'

재난, 곤경도 마찬가지다. 나만 아니면 괜찮다는 생각을 우리는 알게 모르게 하고 있지는 않은가?


영화 속 질문은 이렇다.

'그녀가 곤경에 처하기 전에 우리는 왜 도움의 손길을 던지지 않는가?'

강간을 당할 처지가 되고 그녀의 머리가 끌어당겨져 끌려가면서도 사람들은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다. 아티스트가 바지 지퍼를 열려는 순간 누군가가 달려와 행위를 저지한다. 그러자 다른 모든 사람이 벌떼처럼 일어나 그 아티스트에게 몰매를 안긴다.

영화는 다시 질문을 던진다.

'도움을 주는 행위조차 주체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선동적으로 움직이는 건 아닐까?'

영화는 우리들이 때 늦은 도움의 행위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


또한 크리스티안은 소매치기당한 소지품을 되찾기 위해, 범인이 살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한 아파트를 핸드폰의 위치추적으로 알아낸다. 그리고 전체 아파트에 범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우편함에 넣는다. 그렇게 크리스티안은 빼앗긴 소지품을 되찾게 된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한 범인을 대상으로 한 편지였지만, 그 편지는 아파트에 살고 있는 여러 세대에 뿌려졌기 때문에, 한 이민자 소년이 억울한 누명을 당하게 된다. 소년은 아빠가 자신을 도독으로 의심한다며 크리스티안을 찾아와 끈질기게 협박하며 사과를 요구한다. 물론 크리스티안은 사과를 거절한다. 

영화는 또한 여기서 질문은 던진다.

'한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의심하고 병들게 하는 것은 아닐까?'


자신의 집을 찾아와 한밤이 될 때까지 도와달라고 외치는 소년의 목소리가 어둑한 복도에서 울려 퍼진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크리스티안은 뒷날 소년이 사는 곳을 찾아가 사과를 하기로 결심을 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소년은 이미 이사를 나가고 없다. 


영화는 말한다. 

'강간을 당할 처지에 놓인 여성을 돕는 일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사과의 순간도 타이밍이 중요하다'



크리스티안은 바로 우리의 갈팡질팡하는 모습이다. 우리가 늘 일상에서 겪을 수 있는 소재들로 우리의 이중성에 대해 펀치를 날리지만 또한 왜 그럴 수 밖에 없는지 이해를 못하는 것도 아니다. 결코 쉽게 답에 다다를 수 없는 질문으로 던지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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