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Love and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종현 Sep 12. 2024

그게 맞아?

파리 올림픽이 끝나고, 시간이 조금 흘렀다. 스웨덴은 공영 방송국이 중계권을 사지 않는 바람에 TV로 보진 못했다. 올림픽에 그렇게 관심이 있진 않아서 사는데 불편은 없었다. 다만, 늘 정치적 의사 표현을 못하게 하는 스포츠 업계이지만, 이번 올림픽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초대를 못 받은 뉴스를 보곤 조금 의아했다. 출전 제한 자체가 정치적 행위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출전을 시켜서 그냥 야유를 받게 하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얼마 전 스웨덴에서 성공리에 끝난 유로비전에서는 이스라엘이 참가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로 인해, 호스팅 국가로서 스웨덴은 쇼 비즈니스의 화려함을 잘 보여줬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많은 논란이 있었다. 관중석에서는 이스라엘 가수의 등장에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이스라엘은 꽤나 높은 점수로 우승을 할 수도 있었는데, 만약 그랬다면 스웨덴이나 유로비전이나 꽤나 골치가 아플 일이었다. 참고로 유로비전의 캐치워드는 '음악으로 하나 되는'이다. 이래나 저래나, 세상 공정한 척은 다해도 세상은 늘 불완전하다. 뭐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소셜 미디어에 이런 숏츠가 뜬 적이 있었다. 오상욱 선수 때문에 펜싱에 대한 열기가 뜨거울 때였는데, 프랑스 펜싱 선수와 한국 펜싱 선수를 비교하는 영상이었다. 비교의 대상은 두 선수가 심판에게 보이는 태도 혹은 매너의 문제였다. 프랑스 선수는 아주 무례하게 심판에게 항의했지만, 우리나라 선수는 아주 정중하게 문의하는 매너를 보여 참 보기 좋았다는 국뽕의 뉴스였다.  


<출처: 스포츠한국 이정철 기자, "심판 향해 조롱… 한국전 펜싱 대신 항의만 보여준 '개최국' 프랑스">


여기서 난 그게 뭐 뉴스거리인가 싶었다. 아니, 그리고 심판에 왜 공손해야 하는가? 그게 꼭 좋은 일인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프랑스가 어떤 민족인가? 자기들 손으로 왕정을 끝낸 민족이 아닌가. 그런 역사를 가진 민족답다. (나는 아직도 스웨덴에 왜 왕이 있는지 모르겠다. 스웨덴 사람들은 다른 나라처럼 왕을 존경하거나 사랑을 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관심조차 없을 뿐더러 마치 없는 사람 취급한다. 차라리 그럴 거면 왕을 없애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다. 현재 가장 발전된 형태의 민주주의 국가라고 평가받는 나라에서 무슨 구시대적 왕정이란 말인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심판이든 뭐든 자신이 생각했을 때 불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문화가 더 좋은 것이 아닌가? 심판이기 때문에 머리를 굽신거리는 자세를 꼭 취할 필요가 없는 문화가 프랑스 문화라면 그게 더 민주적으로 발전한 게 아닐까? 


스웨덴에서 수업을 들으면서, 우리나라의 그 공손해야 한다는 강박이 얼마나 개인의 의견 표출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는지 다시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여느 날과 같이 수업을 듣고 있었다. 덴마크에서 온 학생이 손을 번쩍 들더니 교수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지금 당신이 가르치는 내용을 난 전혀 이해할 수가 없어요. 나를 제발 조금 더 효과적인 방법으로 이해시켜 주세요."

교수는 조금 당황한 모습이지만, 학생을 꾸짖진 않았다. 그는 다른 방법으로 그 학생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다. 교수는 학생이 그런 말을 할 권리가 있다고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교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이고, 학생은 서비스를 제공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이 상황이 그렇게 불편하지 않다. 사실 이게 맞지 않은가? 그 학생이 무례하다고 느낀 건 그 교실에서 나 혼자였다고 생각한다.

지금 생각해 보니,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되었다. 그게 용기를 내서 말할 수 있는 사회라면 그건 사회가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용기라고 말하지만, 스웨덴에선 그건 용기 없이도 당연히 할 수 있는 말이다. 그것도 당당하게 말이다. 

설명을 이해 못 했던 건 그 덴마크 친구만이 아니었다. 나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다만 나는, '집에 가서 이 부분을 다시 봐야겠군...'이라고 생각했다. 수업에 문제를 제기할 생각도 하지도 않았다. 수업을 이해 못 하는 것은 내가 모자라고 부족해서 그런 것이지, 절대 교수님의 잘못일 리가 없다고 생각해 온 습관이 아직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우리 사회는 모든 것이 '내 잘못'으로 돌리려는 못된 습관이 예의라는 이름으로 가르친 것은 아닐까? 개인의 잘못이지 사회의 잘못은 아니라고 은연중에 우리는 교육을 받아왔던 것은 아닐까?  

스웨덴은 평등한 관계를 상당히 중요시하는데, 이는 직장에서 뿐만이 아니라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교수의 이름을 그냥 부른다. 그러니까 '제임스 교수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냥 '제임스야'라고 말이다. 호칭에서부터 관계의 높낮이를 두지 않는 셈이다. 또한 학기가 끝나면 늘 학생들로부터 피드백을 세미나처럼 열어서 받는다. 학생들이 직접 손을 들어 좋았던 점이나 부족했던 점들을 이야기하면 교수들은 그걸 듣고 다음 학기에 반영한다. 


권력을 가진 자에게 당당히 그리고 무례하게 대응하는 건 아주 멋진 일이다. 나보다 나약한 사람에게 무례하고 권력 앞에서 아부하는 모습보다는 훨씬 낫지 않은가?  







 


위로의 길을 따라 걸을 것 (안종현)


매거진의 이전글 Life is Miserable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