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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런 거니까!"

by 정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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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40 생일 선물 (좌) 아내 39 생일 선물 (우) by 딸래미

"이거? 내가 그런 거니까"


아내와 나는 몇 해 전부터 딸아이로부터 '그림' 선물 받는 걸 고대한다. 아이 그림의 느낌이 좋아서다. 그림 그릴 때 유독 딸아이가 신경 쓰는 부분이 있다. 나는 그 작업을 옆에서 꽤 흥미롭게 지켜보는 걸 좋아한다. 바로 그림 우측 하단에 사인을 새겨 넣는 일이다. '꾀끄만한 녀석이 언제 또 자기 사인을 만들었데..' 신통한 마음을 숨기고 '너 왜 그 사인을 거기에 그려넣었니?' 물었다. 그랬더니 "이거? 내가 그린 거니까!" 당차게 답하더라. 신통에 방통까지 더한 느낌이다. 왜 이런 느낌이 들었을까?


온갖 게 쉬 복제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데 그 안에서 아이가 '자기 것'을 용케 찾아내 모두어 놓는 모습이 기특해서다. 속절없이 진화하는 복제 기술은 이미지 복제를 통해 어느새 인공지능 세상까지 열어젖혔다. 그 인공지능 역시 '학습'이라는 미명 아래 누군가가 이미 작성한 글을 이미지로 흡수하고 영상과 그림을 자기 것인 양 빨아들인다. 저작권이 경시되기 너무 쉬운 상황이다.

r-t4cfz82zU1UqOV.jpg '바람이 분다' 중 간토대지진으로 사람들이 대피하는 4초 간의 장면.

오죽하면 지브리 스튜디오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삶에 대한 모독"이라며 AI가 사람들에게 '지브리풍' 이미지를 마구 생성해주는 현실을 개탄했겠나 싶다. 그도 그럴 것이 애니메이션 '바람이 분다' 중 4초짜리 군중 장면을 위해 지브리 애니메이터들이 무려 15개월을 작업했다고 한다. 이제 애니메이션을 문장으로 입력해 만들어버리는 시대가 되었으니, 한 시대의 사조를 일군 거장의 입에서 거친 말이 나오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다. AI시대는 어쩌면 창작자들에겐 저작권 유린의 시대인지 모르겠다.


저작권은 창작자의 권리이다. 작품이라는 '내 자식'을 창작자가 스스로 지킬 수 있게 해주는 보루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딸아이의 당찬 사인이 더 크게 느껴진다. "내가 그렸으니까" 이 말은 단지 "이거 내 거야!" 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책임의식과 자존감이 서려 있다. 저작권의 본질이다. 이 저작권의 본질을 존중해주는 문화가 긴요한 요즘이다. 그게 창작자의 정성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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