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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조속의해파리 Dec 04. 2015

죽여야 살아남는 사회

'더랍스터'와 '헝거게임' 속 남 얘기 같지 않은 이야기


살인은 범죄다.


  여기에 이견이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만약,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면  그땐 어떻게  될까? 혹은 살인은 범죄이지만, 살인이 허용된 공간이  있다면?

  45일간 커플이 되지 못하면 결국 짐승이 되고, 만약 그렇지 않으면 도망자들을 잡아야만 인간으로서의 내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사회가 배경인 영화, '더 랍스터'.  한 명이 살아남을 때 까지 24명의 소년소녀들이 서로 죽고 죽여야만 살 수 있는 사회가 배경인 '헝거게임'.  


  두 영화를 보면서 내게 줄곧 들었던 생각은 하나였다.


이념, 국가가 가지는 힘의 두려움


  영화 속 국가에선, 살인이  당연시된다. '살인' 이 아닌 여러 가지 명칭으로 대체되지만, 그것은 누가 봐도 살인이다. 그리고 그것은 누군가에 의해 조작되고  정당화된다.

  그 누군가- 들은 권력을 누리기 위해 국민들을 조정한다. 미디어를 통해서, 연극을 통해서. 국민들은 대부분 다들 뭔가 이 사회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선뜻 반발하지 못한다. 누군가는 적응하고, 누군가는 참고, 누군가는 반발한다. 반발하는 이들의 일부는 살아남고 대부분은 죽는다. 그래서 대부분, 사회에 반발하기 보다는 순응하며 사는 길을 택한다. 



  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반란이 성공 해 사회가 변화해도 여전히 권력을 가지고 있다. 혹은, 이 사회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가도,  막상 그 자리에 가니  또다시 똑같은 사람이 된다.

  체제에 반발하지 않는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만 욕할 수 있을까? 체제에 반발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정당한 일을 한 사람이라고 치켜세울 수만 있을까? 문제는 관점이다. 그리고 문제는 국가다. 국가- 그리고 그 지도자가 어떤 주관을 가지고 이념을 가지고 있냐에 따라 모든 시선은 달라진다. 솔로가  죄악시되기도 하고 커플이  죄악시되기도 한다. 그것은 어떤 '관점'의 차이고, 그 사회 문화- 그리고 이념의 차이이다. 


  영화 속 이야기로만 볼 수 없었다.


  일제의 편에 붙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사회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대한민국의 독립을 외치는 사람을 처벌했고, 대한민국의 주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죽였다. 그리고 그들은 독립이 되자 '대한민국이  해방될 줄 몰랐다.'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살아남았다. 자국민을 죽이고도 살아남았다. 뿐만 아니라 일제시대 때 축적한 부를 통해 대한민국의 정권마저 다시 가져 가난해진 '독립군'의 후손들을 밟으며 살아가고 있다.

  독재가 싫어서- 그들이 다시 권력을 가지는 게 옳지 않다고 생각해 독재를 처벌한다 했지만, 결국은 그들과 손 잡고 권력에 동참한다. 그리고 '나는 다르다'고 외친다.


그녀가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첫번째는 영화이기 때문에 가능했고, 둘째는 10대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모습을 보는 국민들은, 계속 이게 아닌데-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 생각하지만 반발하지 못한다. 목소리가  커질수록, 손해 보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라 생각이 들고, 나만 힘들 뿐 아무것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냥 순응하며 살아간다.


  살아남은 자가 이긴 자이다. 역사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우리 후대의 사람들은 이제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기억해야 된다"라는 미명 하에 역사적 사실조차 알 기회를 잃어가고 있다. 마치 '헝거게임' 속의 예쁘게 포장된 퍼레이드나 쇼처럼 좋은 사실들만 나열하는 미디어, 커플의 행복함- 솔로는 저주받은 존재라고 보여주는 '더 랍스터' 속의 호텔의 쇼들처럼.



'이 곳은 밥과 식사, 그리고 옷이 제공되는 호텔입니다. 당신이 커플이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든 이 곳에서 살아남으세요. 살아남은 당신에겐 모든 이의 존경과 자유가 주어집니다. 해피 헝거게임 ! '  


  진실은 그게 아니다. 커플이 아니면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나와 '다른' 사람들을 '죽게 될 걸 알면서도' 잡아 와야 하고, 만약 그것도 하지 못한다면 내가 짐승이 되어야 한다. 또 헝거게임에서 살아남은 나는 굶주리지 않아도 되는 대신 평생 국가의 체제를 선전하는 노리개가 되어야 한다. 국민들은 모두 화려한 '쇼'에 놀아나고 있을 뿐, 현실은 살아남기 위해선 식권과 목숨을 맞바꿔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평가 이전에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이다.


  어떤 시선에서, 어떤 국가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개인의 행동은 국가차원에서 다르게 평가될 수 있다. 또 마찬가지로, 개인의 차원에서 개개인간의 입장에 따라서도 다르게 평가된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평가 이전에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저 커플이 아닐 수 있는 권리, 혹은 커플일 수도 있는 권리가 필요한 것이다. 그저 모두가 함께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는 것. 내 자식이 죽을까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되는 삶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올바른 진실을 알 권리와, 거기에 대한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권리 또한 필요하다. 다른 의견을 낸다고 상대방의 의견을 짓밟는 것이 아닌, 다름으로써  존중받을 수 있는 것 또한 자유주의가 아닌가. 


도망친 그들은,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까?


  "사랑에 관한 기묘한  이야기"라고 했나, 영화 속 세상만 기묘한 게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이 대한민국이 더 기묘하다. 자유민주주의를 외치는 우리나라가 영화 속 세계처럼 어느 새 자유와 민주주의 모두 놓치고 있는  듯하다. 헝거게임처럼 10대의 패기가 없는 우리들은, 더 랍스터 속  사람들처럼 기껏 해야 도망치고 눈을 가리고 살아간다. 


  비정상이 정상이 되는 사회, 정상이 비정상이 되는 사회.

  두 영화 모두, 딴 세상 얘기로만 느껴지지 않는 현실에 기분이 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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