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에 대한 정의는 내가 내린다. 중요한 건 자세와 자유로움이다.
아프리카를 연 5-6회 다니는 직업 특성상 긴긴 출장을 끝내고 집에 귀가하는 날이 다가올수록, 한국에 돌아가자마자 무얼하며 휴가를 보낼지 달콤한 상상을 하며 버틴다. 주로 맛있는 것 먹기, 푹 자기, 가족들과 시간 보내기 등의 골자로 구성되는 '해외출장 후 휴가'는, 출장만큼이나 열과 성의를 다해 투철하게 준비하여 '쉼'이라는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 과제가 있는 아이러니한 ‘일정’이다. 우선 한국 적응이 먼저다. 공항에서부터 무전기 소리가 나면 내 무전기가 어딨나 급히 몸을 뒤지고, 시야에서 무엇인가 꿈틀거리면 모기나 벼룩일까 겁내며 소스라치는 등 몸이 먼저 반응하기 때문.(나는 이것을 아프리카 출장 후 증후군 post-African trip syndrome이라고 부르고 싶다.)
보통 중동이나 방콕/홍콩을 경유하며 아프리카를 여행하는 시간은 편도 17-22시간 가량 걸린다. 오후도착 비행기라면 집으로 가 저녁이라도 먹고 잠들지만 간혹 새벽 6시에 인천에 내리면... 심히 난감하다. 귀국날은 그냥 하루종일 자버리기도 하지만, 힘든 스케줄을 2-3주간 매일 소화하다 갑자기 푹 쉬어버리면 더 병날 때도 많아서 휴가 첫날, '잘' 쉬기 위한 작전이 시작된다.
모든 여성 NGO직원의 경우라고 일반화해서 말할 순 없겠지만, 나에게 아프리카 출장은 흡사 군대생활과 비슷하다. 물론 난 군대를 가본적이 없지만, 일단 그곳에서 나는 여성임을 잊는다. 뜨거운 물도 안나오는데 샴푸 후 컨디셔너는 사치일때가 많고, 선크림을 챙겨 바르고 다니는 것도 힘든 상황인데 사파리 모자와 조끼, 등산복 차림으로 흙투성이/가시 박힌 워킹화를 신고 숯 냄새가 나는 가방을 매일 매고 다니니까. 귀국할때쯤 되면, 거울 앞에서 한층 탄 피부색과 더불어 원시인이나 바야바를 마주하곤 한다. 그리 당황스럽지는 않다. 매일매일 조금씩 일어나는 변화이기 때문에 나는 잘 모른다. 당혹감은 보통 가족들이나 마중나온 팀원들의 몫...
심한 먼지바람과 자외선에 시달린 피부, 그리고 출장 기간 바짝 오른 군기와 함께 치솟은 씩씩함을 진정시키고자 피부과를 찾았다. 출장지역의 기후에 따라 극도의 무더위와 싸우다 벗겨지고 그을려서 온 피부, 일교차의 롤러코스터와 씨름하다 온 피부, 늘어진 모공, 입술이 잔뜩 부르트는 단순포진, 아무런 제품의 흡수도 불가한 피부 등등 그때그때 상태를 보고 원하는 관리를 받는다. 이날은 진정관리를 받았다. 약 1시간이 소요되는 이 일정동안은 편안하게 누워 '그래 나는 여자였어'를 되새긴다. 그러다 스르르 잠들기도 다반사이고 일어나면 당장 피부가 육안으로 달라지진 않지만, 첫걸음은 해낸 기분으로 피부과를 나선다.
어렸을 땐 강남역에 전혀 올 일이 없었다. 약속이나 볼일이 있거나 가야할 곳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면. 그마저도 다른 곳에서 해결하곤 했다. 너무나 번잡하고 부담스러운 곳이었기 때문에. 왠지 '강남'이라는 단어가 주는 그 위압감 비슷한 무언가 때문에.
어쩌다 현재의 동네가 되어버린 이곳은 사실은 전혀 그럴 필요도 없는 곳이고 되레 흥미로운 곳이다. 예전에는 젊은이들의 놀이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삼사십대 직장인들, 구두수선가게, 모델하우스 판촉, 버스를 기다리는 할머님 할아버님들이 눈에 들어온다. 갓 해외에서 들어온 '외국인 마인드'의 시선에 잡히는 풍경들일수도 있겠으나 어쩌면 내가 그만큼 나이를 먹은 것도 있겠지. 참 예쁘고 근사한 사람들이 많다. 애초에 피부과를 가느라 생얼에 선글라스 차림으로 나오긴 했으니, 대신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들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낀다. 그들의 눈에는 강남역 일대에서 생얼에 슬리퍼 끌고 돌아다니는 나는 안중에도 없거나 아마 조금 없어 보이리라. 가끔은 없어 보이는 것도 나쁘진 않다. 그거보다 중요한 건 쉬는 거기 때문에. 이들은 뭐하는 사람들이길래 이시간에 이러고 돌아다니고 있으려나? 하긴, 나도 이러고 있는데. 이런사람 저런사람들을 구경하며 강남역에서 신논현역 방향으로 걷다 보면 적당한 운동도 된다. 집에 가만히 있는 거에 비하면 운동이지 뭐. 어차피 아프리카에서 행군 못지않은 일정을 맨날 소화해서 다리는 조금씩 풀어주어야 한다.
걷다보면 거의 모든 것이 다 있는 강남역 특성상 사야할 것이 생각나기도 하고, 살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인데도 사고 싶어지는 것, 구경해보고 싶은 것들도 생긴다. 어쩌면 무언가를 하고 싶어진다는 것은 삶에 대한 의지이다. 그러므로 좋은거다. 지하상가만 가도 핸드폰 케이스, 악세서리, 옷, 속옷, 양말, 편의점 등등... 아무데나 멈춰서 아무거나 볼 수 있는 곳이다. 거기다 요새 새로 나온 노래, 공연, 오늘 생일인 아이돌의 이름과 얼굴까지 파악이 가능하다. (어디선가부터는 투머취다. 역문화충격 온다. 나는 어제까지만해도 분명 당나귀와 소가 차량과 함께 다니는 길에서 있다가 왔다.) 원한다면 강남역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꾸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 모처의 가게에서 공짜로 화장도 하고, 옷도 입어보고, 향수도 뿌려보고, 테이크아웃 음료나 거리 간식도 무궁무진하고, 무료로 나눠주는 부채도 받고, 도를 아십니까도 만나고 ... 삶의 미니어처 같은 이곳.
오늘의 일정은 비용을 최소화하는 거였으므로 아무것도 사지 않고 아무것도 사먹지 않고 걸어서 서점으로 왔다. 아마 빵꾸난 내 통장만 아니었다면 손에 무언가는 들려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오늘의 컨셉은 <맨몸과 빈손으로 강남역 활보하기> 이다. 무더위에는 밖에서 걷는 것도 오래하면 지친다. 시원한 에어컨이 있는 서점을 들어서자 낯선 글자들이 반긴다.
가끔 서점에 아무 생각없이 들르면 무슨 책을 어디에서부터 봐야할지 우왕좌왕 할 때가 있는데 (무질서의 아프리카에 있다 보면 질서 자체가 낯설다), 대형서점의 대형매장이라면 이럴 때 센스있는 공간구분으로 나같은 갈팡질팡러들을 쉽게 안내해준다. 백지상태의 머릿속에 차례차례 단어들이 입력이 된다. 내게 필요한 것이 SNS저자들의 휘릭 읽는 책들인지, 고전과 함께하는 북캉스인지, 혼자 잘 살기 인지 자기계발인지 등등.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서점 입장에서는, 온라인 배송과 e-book이 만연하는 시대에 사람들을 책방이라는 물리적인 공간으로 이끌고 그 안에서 머물다 가게 해야 하는 목적이 있는 거니까. 도서 매출과 전혀 상관없이 한구석에서 낮잠을 자든 꽃을 사든... 그건 오는 사람들의 자유이지만 말이다.
책을 보다 또 생각난 책을 검색대에서 검색해보고, 그 책을 찾다 또 다른 책이 눈에 띄어 그 책을 들여다보고, 하며 일정시간을 보낸다. 피부과에서 혹시 기다리거나 어디 까페에 들어가서 보려고 가방에 넣어온 책 대신, 누가 좋았다고 했던 책과 오늘 처음 본 책 2권을 사고 서점을 나온다. 충동구매가 맞다. 그냥 오늘은, 다른 걸 사느니 책을 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꼭 그렇게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
어느새 저녁시간때가 되어 집으로 터벅터벅 향한다. 오늘 하루 알차게 보냈다는 뿌듯함과 함께. 한꺼번에 모든 걸 다 뛰어넘을 수는 없다. 어제 아프리카에서 온 내가 오늘 이정도만 해도 조금은 돌아온 느낌이 든다. 내 고향 서울 한복판에서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모든 것을 살펴보고 사고해볼 수 있는 것, 이것이 해외출장 후 휴가의 가장 큰 묘미라고 느껴진다. 갓 내려 고소한 250원짜리 에티오피아 커피 ‘분나’가 그립고 (이 세상 최고 맛있는 커피!), 시끄럽게 몰려드는 아이들과 넓게 펼쳐진 푸르른 동산은 없지만... 강남역 특유의 LTE급 속도와 모든 것이 가까운 편리함 속에서 수많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치열한 사람들 속, 에너지를 조금은 채운 듯한 느낌으로 강남역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