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 <버닝>을 보며 들었던 생각
*<변산>과 <버닝>, <시>의 스포일러가 한가득입니다. 지뢰 주의.
<변산>(이준익, 2018)을 보고 왔다. 좋아하는 박정민 배우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충분히 활용된 영화고, 개인적으로는 뭔가 2프로씩 아쉽고 나와 핀트가 맞지 않았던 김고은 배우가 맞는 옷을 입은 듯 귀엽게 뛰어노는 유쾌한 영화라 전반적으로는 만족스러웠다(일단 그녀를 자꾸 나이차 많이 나는 어른들 사이에 던져놓지 않아서 좋았다.). 오글거릴까 걱정했던 랩도 나름대로 배우의 노력으로 선방했고, 극의 흐름을 방해하기보다는 오히려 주인공의 감정선을 이끄는 주요 매개로서 극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말과 상황에 따른 유머가 나름 빵빵 터지는 맛도 있다. 누굴 깎아내리고 조롱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터지는 건강한 웃음.
아쉬운 점은 분명 청춘을 이야기하고 있는데도, 그들의 방식이나 가치관이 다소 요즘것들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로 되어 있던 시나리오 속 노래방 씬 노래를 부가킹즈의 '여행길'로 바꾼다 한들, 학수가 새롭게 마음가짐을 다잡고 서울로 돌아가는 계기가 되는 용대와의 뻘밭 싸움 장면은 지금의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안 간다. 일단 아무리 미화한다 해도 학수와 용대의 관계는 그저 어린 시절 대장과 꼬봉 수준이 아니라 심하게 말하면 폭력을 동반한 괴롭힘의 가해자-피해자 관계고(뭐 훔쳐오라 시키는 것이나 멀쩡한 얼굴에 낙지 올려놓고 숨 못 쉬게 하는 건 그저 그런 어린애 장난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 관계의 '동창생'이(다 한 동네 살았고 동갑이라 해서 모두가 친구는 아니지 않나) 몇 년만에 성인이 되어 만나서 치고박고 싸운다는 건 오래 묵은 감정의 낭만적인 해소라기보다는 응당 경찰이 출동하는 게 자연스러운 성인 간의 폭력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런 의아함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영화에서는 마치 클라이맥스처럼 그 때 그 초등학교 시절 동창들이 하나 둘 싸움 구경하러 모여 동창회를 갖는다. 너무 심한 아재 감성 아닌가? 속 편해도 너무 편하다. 요즘 청춘을 대상으로 뭔가 말하고 싶었을 때 가장 핫한 요소인 랩을 소재로 쓸 생각을 하기보다는 일단 이들이 갈등을 빚고, 해소하는 그 과정을 어떻게 잡을지부터 생각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더 심각한 의문을 가졌던 건 <버닝>(이창동, 2018)이었다. 영화라는 매체로서만 본다면 올해 본 영화 중 가장 황홀한 경험을 하게 해 준 작품일 것이다. 아직도 이래서 영화가 의미를 가질 수 있구나, 하는 안도감도 함께. 하지만, 결국 지금을 살아가는 청춘에게 칼을 쥐어주고 기어코 피를 보게 해야만 했던 감독의 속내를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마지막 장면이 실제 종수가 행한 것이 아닌 종수가 비로소 '쓰게' 된 소설 속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감독이 몇몇 인터뷰에서 작금의 청춘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하더라도, 50년대생 감독이 90년대생 젊은이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결국 칼과 그 칼로 명백히 원인이라 특정하기 어려운 대상에게 열등의식과 분노의 마음을 표출하도록 하는 것 뿐이었나, 하는 의문을 떨칠 수 없다. 더 심하게 보면 앞에서는 그레이트 헝거인 해미를 이해하고, 아직 어떤 것을 쓸지 정하지 못하고 헤매는 종수를 보듬는 것 같다가도, 그 마지막 칼자루 때문에 결국에 넌 이렇게 될 운명이었어, 라며 이미 답을 정해놓고 달려온 것 같아서 계속 씁쓸하다. 이게 나의 오독이라 하더라도, 기성세대가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다룰 때는 애써 지금의 청춘을 정의 내리거나, 방관자처럼 진단하는 게 아닌 자기들이 저지른 과오를 청산하고 미안하다 손 내미는 것이었으면 했다. 최소 <시>(이창동, 2010) 같은 영화를 만들었던 사람의 신작이라면. <시>에서는 끔찍한 일을 저질러 놓고도 반성할 생각 하나 없이 제 자식만을 감싸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자칫 혼자 모든 걸 떠안는 성녀처럼 보이긴 해도) 손자가 제대로 된 죗값을 치르게 하고, 피해자의 목소리에 하나가 되는 할머니의 모습은 소름을 넘어 경외심까지 들게 만들었었다. 지금 청춘들의 가장 큰 특징인 번짓수를 잘못 찾은 분노와 만성적인 열등감을 만들어낸 윗 세대의 대표로서, 먼저 미안하다 말하고 새로운 길을 틔워주는 이야기를 할 순 없었을까. 자기들은 멀찌감치 서서 구경만 하면서 그들끼리 상처주고 찌르게 할 게 아니라.
이쯤 되면 지금, 청춘의 이야기는 지금 그 시기를 관통해가는 사람들이 하게 하는 게 맞지 않나 싶다. 둘 다 50년대 생들이 80, 90년대생 이야기를 어떻게든 하려다 보니 뭔가 자꾸 이게 아닌데, 핀트가 어긋난 부분들이 보인다. 한창 <88만원 세대>(우석훈 저)란 책이 유행일 때, 결국 결론이 '청년들이여, 짱돌을 들어라' 여서 코웃음쳤던 게 생각나고, 오히려 이미 공고해진 시스템 안에서 배를 곯아가며 과외를 하러 다니고, 누추한 반지하 방을 보고 생각했던 서울이 아니라는 동생에게 원래 서울은 이런 거라며 달관한 듯한 말을 던지는 김애란의 소설에 더욱 공감했던 게 당시의 청춘들이다. 결국 청춘의 이야기는 지금 그 시기를 살아가는 그들 스스로 하게 만들어야 맞다. 그래야 왜곡 없이 그 마음을 세상에 남길 수 있다. 왜 자꾸 어른들이 청춘의 이야기에 끼어들려 할까. 지금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 꼰대 소리를 듣고 외면당할까봐? 꼰대라 칭해지는 건 소재 때문이 아니라 주제와 태도 때문일 텐데. 이렇듯 어른들이 청춘의 이야기마저 차지해 버린 속에, 지금 주류 시장에서 동세대의 이야기를 또렷하게 할 수 있는 '청년' 감독이 몇이나 될까를 떠올리면 살짝 아득하다. 나름 30대 감독들이 안정적인 자본 속에서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며 데뷔했던 시기도 있었는데. 물론 최근 <족구왕>이나 <소공녀> 등의 빛나는 성취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작디 작은 영역 안에서의 물수제비 정도였던 것 같다. 기득권이 청년들에게 허용한 범위라는 건.
기록은 이긴 자들의 것들이고, 또한 기록이 된 것만이 이긴다. 그래서 좀 비약적인 결론이지만, 지금 이 시기가 더 가기 전에, 지금 우리 세대의 모습을 기록하고 대변할 수 있는 무언가를 남기고 싶다. 수줍게 숨긴 단어를 내뱉건대, 사실 그 무언가는 결국 영화일 것이다. 물론 이미 지나버린 20대를 이제와 내가 하겠다고 덤비는 건 어른들과 똑같은 과오를 답습할 뿐이니, 나는 30대 여성의 이야기를 담아야겠지. 내일 병원에서 듣는 결과에 따라 그 시기는 조금은 달라지겠지만. 어쨌든 글을 쓰고, 카메라를 들 힘은 있었으면 좋겠다. 그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