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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이라이트 Feb 28. 2024

반칙 같은 고전 서평집

박연준의 <듣는 사람>을 읽고


작가님, 조곤조곤 침 튀기며 말하시네. 박연준의 고전 서평집 《듣는 사람》을 읽으며 떠오른 작가의 이미지,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목소리의 느낌이다. 사랑하는 작품을 소개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열띤 목소리가 나오고 중간중간 너무 흥분한 건 아닌지 정신을 차리는 글의 연속이다.


독서의 본질은 침묵

책을 이야기하는 책인데 제목은 왜 ‘듣는’ 사람일까? 독서라는 행위가 그의 말을 빌리자면 저자의 말을 듣는 “침묵 속 경청”이기 때문이다. 박연준은 자신이 그렇게 듣고 감탄한 고전 39편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거짓말을 서슴지 않는다. “‘고전’을 읽는 묘미는 그 안에서 훌륭함을 찾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옛사람의 생각을 엿보고 시차를 뛰어넘어 공감하는 데 있다”라고 썼지만 정작 자신은 그 훌륭함에 매료되어 열변을 토하고 만다. 물론 후자의 ‘공감’ 부분에도 소홀하지 않다. 현시대에 자신이, 특히 어느덧 중년에 접어든 문인으로서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무딘 칼날로 썬 것처럼 예리하고도 부드럽게 책장 곳곳에 펼쳐 놓았다.


감각적 문장들

그 칼질 끝에 나온 문장들이란. 짧은 문장으로 긴 장면을 마음의 영사기에 비춘다. 예를 들면 “모든 첫 문장은 글의 뿌리이자 시작점이다. 나머지 문장은 첫 문장에 머리가 잡힌 채 ‘매달리어’ 간다” 같은. 첫 문장의 중요성을 이처럼 영화적으로 묘사한 문장은 처음이다. “좋은 소설은 (중략) 다 읽은 후 고치처럼 몸을 말고 웅크리게 만든다. 마치 상처받은 것처럼. 이야기가 몸에 상처를 내고 들어와 나를 재구성하는 과정이랄까” 같은 문장은 좋은 책을 읽은 후 마음으로 느끼는 감각을 온몸으로 확산한다.


이런 문장들은 ‘듣기’를 강조하는 제목이 무색하게 시각과 촉각까지 자극한다. 혹부리영감의 노래주머니처럼 박연준의 글발주머니가 있다면 베어다 몰래 붙이고 싶다. 안 아프게 잘라 드릴게.


박연준은 좋은 산문의 조건을 “말하듯 자연스러울 것, 관념이나 분위기를 피우지 않고 구체적으로 쓸 것, 작가 고유의 색이 있을 것, 읽고 난 뒤 뒷맛이 개운하고 그윽할 것”이라고 말하는데, 사실상 자신의 문장에 대한 평이라 봐도 무방하다.


그의 문장에 대한 감상만 잔뜩 늘어놓는 것은 내 의도가 아니라 생각의 줄기가 자꾸만 그쪽으로 뻗기 때문이다. 이 책이 어떤 서평집보다 돋보이는 이유는 단정하고 곱다는 고리타분한 말로 설명하기 미안할 만큼 매력적인 문장 때문이다.


그 외에 2000자 정도의 짧은 글로 각 작품에서 자신이 주목한 부분을 소개하고 그것을 작가에 대한 소개와 자신의 소회와 균형 있게 엮는 구성도 서평이라고 하기 미안한 북리뷰를 쓰는 사람으로서 배울 부분이었다.


독서 에세이를 쓰면 안 되는 이유

이런 책은 반칙이다. 출판사 이야기장수의 이연실 대표가 어느 강연에서 작가 지망생들에게 경고했다. 독서 에세이로 책을 낼 생각이라면 온라인 서점에 들어가서 독서 에세이 베스트셀러 목록의 저자 이름들을 보고 과연 자신이 이길 수 있을지 잘 생각해보라고. 《듣는 사람》은 저자의 이름발에 글발에, 심지어는 표지를 보라. 서가에 책등이 보이게 꽂아 놓기 아까울 만큼, 역동적 배경으로 정적인 독서 행위의 즐거움을 그린 유화가 통째로 입혀 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다. 이런 책을 어떻게 이겨?


그래도 기어이 독서 에세이로 책을 내고 싶은 사람이라면 벤치마킹 차원에서라도 읽어볼 만하다. 사실은 나도 3년 전에 계약하고 여태 탈고 못한 원고가 하필이면 책을 소개하는 책이어서 영감이나 힌트를 얻기 위해, 아니, 잘 쓰는 사람은 어떻게 쓰는지 염탐하기 위해 이 책을 읽었다. 다 읽고 난 소감은? 아니 씨, 여기다 어떻게 비벼? 이건 반칙이라고. 시인이면 시만 써요,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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