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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포케 Apr 15. 2024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을

중년의 중국인 집주인 5

  여느 날과 다름없는 평범한 날을 흔들어 놓을 사건은 귀띔 없이 찾아온다.

  별 거 아니라고 넘긴 사소한 일은 불편함으로 몸집을 불려 가며 우리를 어떻게 괴롭힐지 궁리하며 서성거린다.


  '똑똑.'

  현관을 나가보니 아무도 없다. 환청이었나 싶던 순간 R이 문자를 확인한다.

  '집주인이 낮에는 공동현관 등 끄라는데?'

  이 소란스럽고 귀여운 집으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어떤 이유에서인지 집 주방 등과 공동현관 등 전선에 문제가 생겨서 스위치를 끄고 킬 때 서로 연결 돼서 동시에 불이 켜지고 꺼졌다. 이런 문제가 있다고 집주인에게 말하니 공동현관 스위치를 다른 이웃들이 사용할 수 없게 막아 놓으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근본적인 원인이 해결된 게 아니니 당연히 우리 집에서 주방 등을 켤 때면 공동현관 등도 여전히 함께 켜지고 있다. 창문이 없는 주방이라 낮에도 어두컴컴해서 당연히 등을 켜야 하는데 낮시간에도 켜져 있는 공동현관 등을 본 집주인이 R에게 문자를 보낸 거다.


  '어이가 없네.'

  전선에 생긴 문제라면 여러모로 큰 비용이 발생하는 걸 잘 아는 집주인은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는 대신 공동현관 스위치를 막는 값싼 방식을 선택했다. 그렇다면 우리 집 주방 등을 켤 때마다 공동현관 불이 계속 함께 켜질 걸 감수한 선택 아니었는가? 월세도 성실히 잘 지불하고 있는 우리가 이젠 한낮에도 어두컴컴한 주방을 사용하기 위해 등을 켜는 것도 눈치 봐야 하는 건지 어이가 없어서 집주인에게 R대신 내가 답장을 하며 시작한 말다툼이 앞으로 생길 다른 사건들의 갈등을 지필 불쏘시개가 될 거란 걸 어렴풋이 짐작하면서도 집주인의 안하무인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할 말을 한다.


  작년 12월을 시작으로 올해 1월, 앞집의 젊은 백인 커플, 위층의 관리자 중국인 부부가 이사 나간 후 집주인은 정신없이 사람들에게 집을 보여준다. 윗집 관리자 중국인 부부가 이사 나가기 전 집주인과 중국어로 언성을 높이며 여러 차례 싸우던 소리로 한 동안 소란스럽던 공동현관이 이젠 집을 보려고 하루에도 몇 팀씩 들락 거리는 사람들 소리로 어수선하다. 하와이 우기는 11월부터 새해 봄까지 지속되는데, 작년 12월 어느 날 하루종일 내리던 비에 열려있던 공동현관 창문으로 들이친 빗물이 우리 집 주방 간이벽 아래 틈으로 들이치기 전까지 들뜨던 마음은 간이 벽 사이에 있던 지저분한 먼지들을 집 안으로 함께 끌고 들어온 빗물을 치우느라 잔뜩 무거워진 걸레를 짜며 함께 하수구로 빨려 들어간다.


  집주인이 누군가에게 위층 집을 보여주던 그날도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또 빗물이 들이쳤어!'

  한 번 물난리를 친 후로는 공동현관 창문을 늘 닫아 놓는다. 비가 많이 내리던 그날도 창문이 잘 닫혀 있는지 확인한 지 얼마 안 된지라 R이 잘못 봤길 바랐지만 현관문 밑으로 빗물이 흥건하다.

  밖을 확인해 보니 창문은 닫혀 있었지만 활짝 열린 동공현관문으로 거센 비가 아낌없이 들이치며 잔뜩 물 먹은 바닥은 마치 집주인에게 빅 엿을 먹은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이렇게 세차게 비 내리는 날,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위층 집을 보여주는 집주인 덕분에 화에 잠식당한 나는 할 일을 마치고 떠나려는 집주인을 불러 따졌다.


  본인 차에서 걸레를 가져와 우리 집 현관으로 들이친 빗물을 닦는 그녀의 구두굽은 빗물보다 더러워 흰 걸레와 바닥을 더 더럽히는 것 같다. 그렇게 물기가 제대로 닦이지도 깨끗해지지도 않는 처량한 바닥을 보며 그녀 옆에 서서 얼마 전에도 주방으로 빗물이 들이친 적이 있어서 비가 오는 날이면 창문을 꼭 닫아 놓는데 이렇게 공동현관문을 활짝 열어 놓으면 어떡하냐고 따져 묻자.

  '너는 내 세입자 아니야. 나는 R이랑 계약했어. 나는 R이랑만 얘기할 거야.'


  그러면서 R의 이름을 불러 제낀다.

  현관문 뒤에서 둘의 대화를 듣다가 그녀가 뭐라고 하는지 정확히 듣고 싶어서 문 열고 나가 R 옆에 선다.

  들어보니 지금 상황과 상관도 없는 이야기를 하며 자신 때문에 벌어진 상황에 대한 언급은 없다. 기가 찬다. 그러면서 거실 창문 밖에 세워둔 내 자전거 얘기가 갑자기 나온다.

  '내가 너희 편의를 얼마나 봐줬는데? 바깥에 세워진 너희 자전거도 너희가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닌데 내가 아무 말도 안 하잖아?'


  그 나이까지 이렇게 살아온 그녀에게 어떤 말을 더 얹는다고 되지 않던 대화가 갑자기 되지 않으리란 걸 너무 잘 알지만 그녀의 괴기한 행동에 스트레스를 받으니 이걸 어느 정도 해소하기 위해서 그녀에게 따지기라도 해야 했다. 자전거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공동현관 등 때문에 문자로 집주인과 말다툼을 하고 바로 다음 날,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가 집 주변 나뭇잎을 치우는 집주인을 마주쳤다. 서로 마주쳐도 없는 것처럼 인사도 안 하고 그녀를 지나쳐 게이트 밖 쓰레기를 버리고 오니 멀쩡히 잘 서있던 내 자전거가 쓰러져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자전거를 다시 잘 세워두며 그녀를 흘겨보니 '아, 그거 네 자전거였어? 나는 다른 세입자 자전거인 줄 알았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 대답도 안 하고 그냥 집에 들어왔다.

  그땐 이 자전거 사건을 R에게 말해봤자 부정적인 기운만 줄 게 뻔해서 따로 말은 안 했는데, 집주인의 태도를 보니 그날이 복기되어 얘기를 해야 했다.


  집주인이 세입자들을 대하는 태도를 관찰하곤 하는데, 그녀는 그녀의 세입자들을 자신이 고용한 일꾼처럼 부리고 싶어 한다는 걸 깨닫곤 이제야 그녀의 괴기한 언행이 말이 된다. 옆집에 살던 남매도 2월 말에 나갔는데 역시나 집주인과 언성을 높이며 말다툼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언젠가 우리가 다른 집으로 이사 가야 할 때 벌어질 상황을 미리 보는 듯 해 벌써 나오는 한숨을 막을 길이 없다.


  우린 당장은 여러모로 괜찮은 조건인 이 집을 떠날 수 없다. 하지만 집주인 때문에 내 모든 게 소모되도록 방치하고 싶지 않아 우린 그녀의 불필요한 요구나 시도 때도 없이 집 문을 두드리는 것에 반응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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