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평생을 강직하고 곧은 군인으로 살아오셨던 외할아버지가 오늘 새벽에 하늘나라로 가셨다. 작년 4월 찾아뵐 때까지만 해도 아흔이 넘은 연세에 비해 너무 정정하셔서 놀랐었는데 안타깝게도 불과 일 년 만에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하실 만큼 쇠약해지셨다. 반평생을 강인한 군인으로 살아오셨던 외할아버지에게 병상에 누워 코에 꼽힌 호스에 의지해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건 아마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큰 고통이셨을 것 같다. 코로나에 세 번이나 감염되셨고 몇 차례 위중한 상황을 겨우 넘기는 일들을 겪는 동안 가족들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는 있었지만 매일 하루를 시작하며 그날이 오늘은 아니길 그렇게 바라 왔던 것 같다. 지난 10월 세 번째 코로나에 감염되신 후 폐렴으로까지 전이되어 상태가 매우 위중했던 시기 코로나 병동에서 어머니가 직접 외할아버지를 돌보시는 동안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한 번씩 전화를 드려 외할아버지 건강 상태를 확인했었는데 외할아버지 병세가 다시 호전되고 어머니도 제주도로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는 외할아버지 안부를 여쭙지 못했고 어머니도 외할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셨다. 몇 번의 고비를 넘기며 가족들은 이미 많이 지쳐 있었고 마음속 깊은 곳의 여러 복잡한 감정들을 잠시만 덮어두자는 그런 암묵적 합의 같았다. 그로부터 한 달 두 달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다. 새벽에 메시지가 오거나 어머니께 전화가 올 때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슴이 철렁했었고 꿈에서 이런 장면을 마주하는 일도 가끔 있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 확인한 외할아버지 소천 소식은 분명 꿈이 아니었지만 그전에 마주한 몇 번의 상황만큼 가슴이 철렁하지 않았다. 외할아버지를 더 붙잡아 두고 싶은 욕심이 그분께서 짊어지고 계신 고통의 크기 앞에서 무너져 내림을 느꼈기 때문이다. ‘오늘 외할머니 생신이셔’란 어머니의 말씀에 마주한 슬픔의 크기에 비할 순 없지만 아주 작은 위안을 얻었다. ‘생전에 외할머니께 그렇게 무뚝뚝하시더니 우리 외할아버지 사실 로맨티스트셨어’란 동생의 말에 언젠가 보내드려야 한다면 그날이 오늘이라 다행이다란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슬픔의 크기를 자꾸 줄여가며 난 그렇게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슬픔을 이겨내는 방식이다. 중국에 건너와 살게 되면서 자주 찾아뵙지 못했지만 명절 때마다 꼭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께 안부전화를 드렸었다. 내가 이십 대였던 시절 안부전화 땐 타국에서 지내고 있는 손자에 대한 걱정이 주 내용이었고 삼십 대를 거치면서는 중국이란 대국에서 튼튼히 뿌리내리고 살고 있는 나를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하셨다. 그리고 사십 대 즈음에선 왜인지 나에게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었다. 그게 어떤 감정인지 깨닫게 되는 날 그때의 일들을 다시 회상하는 그런 일들이 계속 반복되는 게 인생이 아닌가 싶다. 내년 신정 때 즈음해서 외할아버지께 다시는 안부전화를 드릴 수 없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깊은 허전함이 찾아올 것 같다. 또 다른 명절이 찾아오고 또 찾아오고 그렇게 허전함이 점점 작아지고 결국 또 무뎌질 것이다. 유년 시절 가장 행복했던 외갓집의 추억을 선물해 주셨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많이 그립고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