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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는외계인 May 20. 2022

송과장님과 카페모카

송과장님은 S 전자에 경력직으로 입사했다. 국내 대기업과 해외 MBA, 컨설팅 회사 인턴을 거쳐 S 전자에 합류한 지 얼마 안 되어 나는 송과장님을 만났다. 과차장님들로 구성된 차세대 스마트폰 카메라 전략에 대한 TF 팀에서였는데 나의 사수였던 담당 과장님이 다른 부서로 전배를 가면서 내가 깍두기처럼 투입이 되었다. 그때 나는 유일한 사원이었고 유일한 여자였다. 우리는 작은 회의실에서 거의 매일 모여 미팅을 했는데 나이 지긋한 아저씨들로 가득 찬 회의실에 들어갈 때마다 민망하고 부담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나는 주눅 들지 않고 나름 내 몫을 다해보겠노라고 비장한 다짐을 하면서 매번 안간힘을 썼다.


 미팅에서 부장님의 간략한 개요가 끝나자 송과장님이 갑자기 일어나 커다란 화이트보드에 크게 뭔가를 적으면서 설명을 했다. 나는 역시 이런  컨설팅 회사 출신의 업무 스타일인가 보다 생각하면서, 공채 출신의 과차장님들과 묘하게 다른듯한 송과장님의 스타일이 자신만만해 보이다가도 왠지 모르게 아슬아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재치 있는 아이디어와 센스 있는 말솜씨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젊은 친구들의 생각을 궁금해하는 과차장님들에게 거침없이 의견을 쏟아내는 어린 나를 귀엽게 봐주셨던  같다. 송과장님과 나는 식사도 함께 하고 커피도 자주 마실만큼 가까워졌지만 미팅  의견이 부딪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나는 그런 점이 오히려 신선하고 좋았지만 아주 가끔은 내가 송과장님을 난처하게 혹은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하는 노파심이  때도 있었다.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실 때면 송과장님은 늘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는데 가끔 피곤한 어떤 날에는 카페모카를 마셨다. 회사에서 카페모카를 마시는 남자가 흔치 않아서인지 나는 꽤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오래된 일이라 정확한 기억인지 알 길이 없지만 이상하게 나는 카페모카 하면 송과장님이 떠오른다.) 송과장님이 카페모카를 마시던 날 처음으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 주셨다.                                                                   


송과장님은 이전 직장에서 사내 커플로 결혼해 딸 둘이 있는데 맞벌이 부부이다 보니 도우미 아주머니를 쓴다고 했다. 도우미 아주머니는 평일에 집에서 상주하면서 아이들을 돌보고 주말에는 집에 다녀온다고 했다. 도우미 아주머니 찾기란 원래 하늘의 별따기인데 그마저 한국인 도우미 아주머니는 더 비싸고 조선족 도우미 아주머니가 좀 더 저렴하다고 했다. 그렇게 조선족 상주 도우미 아주머니와 함께 딸 둘을 키우며 맞벌이 부부 생활을 해 오던 어느 날, 아이들이 이상한 말을 쓰더란다. 아이들이 "엄마, 물 좀 줘." 하지 않고 "엄마, 물 좀 날래(빨리) 줘."라고 했다던가. 그 밖에도 여러 가지 고민이 있었겠지만 결론적으로 송과장님 와이프는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맘이 되었단다.

                                      

당시 출산과 육아 경험이 전무한 신혼이었던 내가 송과장님의 마음을 깊이 이해할 리 없었지만 사내 커플에서 한 명은 S 전자로, 한 명은 전업맘이 되었다는 사실이 그리 달달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날따라 늘 자신만만해 보였던 송과장님의 어깨가 유난히 무거워 보였고 와이프에 대한 안타까움과 미안한 감정이 슬쩍 비쳤을 뿐이다. 말을 마친 송과장님은 카페모카를 크게 한 입 들이키더니 갑자기 나를 측은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너도 겪어보면 어쩔 수 없을 거야." 인생 선배로서 아끼는 마음에 한 말이었겠지만 송과장님의 미소가 나는 괜히 불편했다.


그 후 몇 년이 지나 나 또한 출산과 육아의 험난한 과정을 겪으며 전업맘에 경단녀가 되었을 때 송과장님 생각이 많이 났다. 아이가 좀 컸을 때 나는 송과장님이 자상한 미소로 예언한 그 '어쩔 수 없음'을 이겨보려고 이를 악 물고 더 아등바등 일터로 나갔던 것 같다. 이제 나도 그날의 송과장님처럼 가끔 피곤한 어떤 날에는 카페모카로 카페인 충전, 당 충전을 한다. 초콜릿 시럽과 커피가 어우러진 달콤 쌉싸름한 카페모카는 구름같은 생크림까지 더해 우리들의 무거운 어깨에, 피곤한 나날들에 제법 호사스런 위로가 된다. 송과장님은 아직도 가끔 카페모카를 마실까? 송과장님 와이프와 가족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달달한 초콜릿 시럽에 취해 신나게 들이킨 카페인에 목이 탄다. (물 좀 날래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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