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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만 Apr 16. 2020

8 of 185, 육아에 매몰된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

2020/03/21, 8 of 185

결혼기념일이었는데,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다. 가지고 싶은 것도 딱히 없다 하지, 육아휴직 2주 차에 적응을 위해 몸부림치며 허덕이다 보니 밖에 나가 돌아다니며 뭔가를 알아보고 살 상황도 아니지, 꽃은 꽃가루 때문에 불안하지, 외식은 시기가 시기인지라 아무래도 어렵지, 뭐 그래서 이래저래 생각만 (솔직히 미안하게도 깊게 고민했다고 까지는 차마 못하고…) 하다가 5주년 결혼기념일을 맞이했다. 애들은 그건 내 알 바 아니라는 기세로 칭얼대고, 언제나처럼 그걸 받아내고 막으며 또 하루를 간신히 보냈다. 그래도 주말이라 함께이긴 했다.


날이 좋으니 그래도 잠시 산책이라도 나가자는 의지를 가지고 지난한 준비의 과정을 거쳐 집 앞 공원에 다녀왔다. 그저 산책 삼아 조금 걷고 편의점에 앉아 아이스크림과 라면을 먹고 왔을 뿐 별 한 게 없는데도, 그런 소소한 행복도 물론 좋긴 했지만, 역시나 더욱 힘들었다. 당연한 거지 뭐. 떨어지는 기분을 서로 느껴서일까 힘내자며 위로하다, 뭐라도 맛있는 걸 먹자고 머리를 굴려 저녁엔 대게를 주문해서 먹었다. 시대에 뒤처지지 말자는 의지로 배달 어플을 써 온 지 좀 되었기에 방법이야 익숙하지만 사실 치킨 족발 보쌈 햄버거 타코 정도가 시켜 온 메뉴였지 대게 같은 것은 생각도 안 해봤었기에, 이게 배달이 되다니 또 이렇게 잘 나오다니 하는 말을 하고 있는 우리를 보며 스스로 이미 어느새 꽤 나이가 들어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특별한 날을 기념하자며 큰 맘먹고 1.1킬로 98,000원이라는 거금을 써서 주문했는데, 역시나 나는 열심히 자르고 깨고 파내는 데 전념하고, 첫째가 한 입에 꿀꺽꿀꺽,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기분이 드는 모습으로 대부분 드셨다.  둘이 같이 제대로 먹기 시작하면, 정말 애들 먹는 것 때문에 돈 많이 벌어야 한다는 어른들 말씀이 농담이 아니게 될 것 같다. 그래도, 그게 싫을 리가 있나. 그렇게 조촐하게나마 서로 위로하고 대화하고 그래서 너무 좋았다. 이후 첫째가 잠드는데 또 한 시간 반 이상 시간을 끌며 온갖 난리를 피워대서 매우 화가 났지만.


간신히 첫째까지 잠든 후 나는 나와 쓰레기 버리고 작은 방과 거실을 정리했다. 열두 시 좀 넘어 나온 와이프와, 같이 아이스크림 먹으며 잠시 대화를 나누고 우리도 잠자리에 들었다. 결기라기엔 너무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저녁으로 돈을 조금 쓴 것을 제외하면 그저 평범한 하루 중 하나로 보냈다 해도 전혀 튀는 게 없었을 날이었다. 내년엔 꼭 어딘가 가서 특별한 하루를 보내리라. 하지만 일단 당장은, 빨리 뭐라도 팔아서 축하금을 만들어야겠다. 출산 축하도 복직 축하도 결혼기념일도 변변히 선물도 돈도 못 해 준 것이 너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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