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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n Oct 06. 2021

한국 여행 중: 다시 보게 된 사주명리학

가족들을 만나러 한국에 온 동안, 4살 아들을 돌보느라 정말 정신없이 시간이 지났다.

이제 3주를 넘어섰다.

 환경의 차이도 확연히 느껴진다. 물론 나의 선호도와 취향에 따라 두 국가의 장단점이 나눠진다.


일단 한국의 포근한 자연과 매일매일 맑은 하늘을 보는 , 가족들과 식사하는 ,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  년간 만나지 못했던 친구지만, 바로 엊그제 학교에 같이 다녔던 것처럼 껴지는 , 지나가는 어르신들의 정스러운 한마디와 관심 등등.

너무 좋다. 이런 친밀감~~~!


덴마크에서 사귄 친구들 중에서도 나에게 성큼성큼 먼저 다가오며, 함께 하고 싶음을 보이는 이들은 대부분 아시아, 유색인종의 피가 흐르거나 외국인 출신 가족을 가진 친구들이기하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이러한 친밀함유대감이 너무 그리웠다.


이번에 한국에 들어올 , 가져왔던 책들이  권이 있었다. 한국 여행  계획한 코펜하겐 인류학과의 노인복지/돌봄 필드 워크를 위해 '돌봄' 관련한 책들과 비주얼 인류학 방법론 . 그런데 어린이집 없이 24시간 육아하는 엄마로서 책을 읽을 시간과 에너지도 없을뿐더러 읽히지가 않았다.


우연히 엄마의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사주명리학 책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실은 올해 초부터, 인터넷으로 무료 토정비결과 사주를 보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것으로 어떤 이해와 위안을 받고 싶었던 걸까. 다른 한편으로는, 이전과는 너무 다르게 살고 있는 나와 나를 둘러싼 현재의 환경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나 하는 막막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 경험하는 중이랄까.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부터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선택하고 싶은지가 모호해졌다. 나보다는, 우리 가족이 처해진 환경과 조건에 따라서, 내 아들이 건강하고 안정되게 살 수 있는 것이 나를 제쳐두고 모든 것의 우선이 되었다. 나를 그 환경과 조건에 맞추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성과 남성과 똑같이 일하고, 어머니로서, 외국인으로서 덴마크 사회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일해야한다는 요구를 받는 상황에서 이런 나의 상태가 굉장히 낯설었다. 그 요구에 따르고 싶어도 그래지지가 않는.


나는 항상 내가 생각하는 , 관심 있는 것만을 보고  방향으로만 가는 것이 언제나 선명했었다. 물론  사이에 여러 장애물이나 고비들이 있었지만, 나를 완전히 멈추게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길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겠는 안개 속과 같은 상태가 되었다.  아들의 엄마로서의 '' 아니라, 그저 ''로서 있고, 만나고, 말하는 것이 어색해졌다.

그 불확실함이 혼란스러울 때, 예전에 들었던 나의 사주 풀이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커다란 산과 같은 땅. 나무, 금, 불과 잘 어우러지고 서로를 키우는...

내가 가려는 길이 맞는 것인가? 이 곳에서 사는 게 맞는 걸까? 나는 계속 빙빙 돌다가 다시 제자리로  것일까? 아니면 계속 원하는 것과 바꾸고자 하는 바가 있었는데 잠시 잊었다가 다시 알게  걸까? 내가 새롭게 이루고자 하는 것은 너무  도전 일가?

이것들을 오래 나를 보아 온 누군가에 묻고 조언을 얻고 싶었다.


덴마크에 유학을 가기 전, 약 5-6년간 집중적으로 작업을 해오다가, 더 이상 해지지 않는 시간이 왔었다. 예술 네트워크 속 인간 관계도 틀어지고, 작업에 집중하는 힘이나 의식의 선명도도 흩어지고, 점점 지쳐가기만 했다.

그런 시기가 사주명리학에서 보면 자연에서 봄과 여름이 오고 나서 가을과 겨울이 오는 것처럼 당연한 것이었다. 주역에서도 해가 지고 어둠 속에서 해의 밝음을 지니고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상태.

 상태의 자연스러움을 눈치 채지 못하고 스스로를 보채며  이상 안되는구나 생각했을 , 주역의 ‘명이괘가 얼마나 마음의 위안을 줬었는지 모른다.  괘를 읽으며 덴마크 가서 귀양살이하듯 공부하며 다시 스스로를 채워야지 라고 다짐했었다.


사주명리의 원리와 주역을 읽으면서  고대의 언어사유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다시 느낀다. 나는 학창 시절, 유교과 도교를 소개하는 윤리 책을 읽을 때가 공부를 하면서도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던 소녀였었다. 그리고 대학 , 리와 기가 만물을 이루고 내재한다는 주자학과 동시에 공간과 몸을 내밀하게 느끼는 펠든 크라이스를 하시는 현대무용가 선생님의 실기 수업을 을 때, 나를 둘러싼 시공간과 몸들과 모두 통하는 듯한 행복한 상상과 움직임을 했었다. 아르코 미술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는, 장일순 선생님의 도교 풀이와 동학을 이은 한국의 사상들,  자연과 조화로운 한국의 건축에 대해 읽는 것이  기쁨이었다.


이후 한참을 동양철학에 대해 잊고 지내다가 근래에 비인간, 다생물종 이론, 신물질주의와 관련한 서양 학자들의 글을 읽으면서 ', 이들은 동양의 고전 철학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할까? 반대로 동양의 고전철학을 공부해오던 이들은  에콜로지의 이론들을 어떻게 평가할까? 궁금해졌다.   상반된 시선이 다른 방법으로 어느  점을 만나가고 있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에콜로지 관련 학자들은 하나같이 빠짐없이 자연에 대한 원주민의 지식/세상을 보는 시선의 중요성에 대해서 언급한다. 한편 주역과 명리학은 수천 년간? 그것의 지식을 발전시켜 오는 과정에서 자연의 사계절 사이클과 순환마다 미세하게 바뀌는 모습, 에너지, 등의 변화들과 그것이 인간의 의식, 기운, 몸에 미치는 영향을 세세하게 섬세하게 감각하고 기록해왔다. 그 엄청난 양의 지식을 통계적으로  체계화했다. 상상으로조차 가늠이  되는  과정.


현대의 에콜로지 이론들에서 요구하는  섬세한 관찰, 자신과 인간 이외의 모든 존재와의 상호 연결성과 자기 투영 없이는  거대한 고전의 작업들이 만들어질  없었지 않았을까.  섬세한 관찰과 감응의 능력을 오늘 기후 위기를 목도하는 삶에 어떻게 가져올  있을까? 그것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매일 연습하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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