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작가와 작가 없음, 혹은 모두가 작가
2. 작가와 작가 없음, 혹은 모두가 작가
일상의 예측불가능성이 예술작업에 개입하는 경우는 시각 예술의 수행적 작업이나 포스트 드라마틱 시어터에서 실험이 되어왔다. 그런데 한 작가가 그의 작업에 대한 네임밸류나 소유권을 가지는 점에서, 특정한 소유권이 없는 공동체적 액티비즘과는 그 차이가 벌어지는 것 같다. 이것이 내가 받았던 두 번째 질문 (앞 글 참조, 예술가의 예술적 방법론의 소유권에 대한 질문)에 대해 -계속 만들어지고 있는- 답이 될 것이다.
근대적 의미에서의 예술작업이 한 작가의 천재적 기량으로 만든 우수한 작품으로 그 업적을 인정을 받아 작가의 이름과 아이덴티티가 뚜렷해진다면, 기후 운동 퍼포먼스에는 그러한 작가적 이름과 아이덴티티가 (기본적으로는) 부재한다. 다른 것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기후 위기의 시급함이 개인의 이름보다 먼저 작용해서일까?
(공동체의 이름으로 기후 운동을 하다가 그 방법을 개인의 작업으로 이어갈 때 다시 작가의 이름이 들어오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차후에 어떻게 진행이 되어가는지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도 공동의 경험을 내 개인의 기억과 관점으로, 내 개인의 글과 소유로 가져오고 있는 행위이기도 하다. )
계획-컨트롤-평가
작가의 이름을 건 공연은 극장 및 전시공간을 비롯해 공공장소에서 일어나는 공연이라 하더라도 작가에 의해 계획된 공간이다. 그 계획은 한 작가의 아이디어와 미학의 완벽한 실행을 위해 필수적이고, 그 계획이 펼쳐지는 공간은 보호되고, 일상의 예측불가능성 또한 컨트롤 아래에 있다.
(이렇게 쓰고 나니 더 극단적으로 자신을 불가능성의, 위험한 공간으로 내몰았던 퍼포먼스 작가들의 작업들도 예외적으로 생각나는데…)
기후 운동 퍼포먼스는 한 액션을 실행하기 위해서 아이디어를 만들고 계획하고 실행하는데, 최소한의 시간과 에너지로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액션에 사용할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는 개개인에 따라 다르지만 각자의 생계와 연관되어있다.) 따라서 각 액션에 대한 컨트롤이 굉장히 제한적이다. 그 액션이 얼마만큼 기술적으로 미적으로 훌륭했는 가에 대해 평가가 있을 자리가 없었다. 혹은 예술작품과는 다른 평가 evaluation 기준이 작동하였다. 익스팅션 리벨리온에서 활동하는 친구들은 그것을 브리프 brief라고 표현하였다.
1. 우리가 이 액션을 실행하는데 서로의 의견과 감정이 존중이 되었는지,
2. 이 액션으로 인해 불편함, 어려움을 느끼거나 연약함의 노출에 상처 입지 않았는지,
3. 이 액션이 미디어에, 정치적 힘을 지닌 행위자에게, 대중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반면 공연 예술에서는 작업의 과정을 평가하기보다 결국 작품의 완성도에 대해서 평가하게 된다. 어느 작업이 콜라주나 어지러운 messy 스타일의 미적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조차도 하나의 미적 취향으로 전체적으로 일관되고 조화되기를 기대한다. 작품의 주제가 일관된 심미적 취향과 방법론으로 잘 여물어진 작품을 높이 평가하게 된다.
공동체 미학: 공동체를 모두 담기
비커밍 스피시스가 기후 운동 퍼포먼스 외에 활동을 했을 때 다른 평가 기준이 작동했던 적이 있다. 콜렉티브로 작업을 하는데 낯설었던 나는 그 기준이 굉장히 놀랍고 흥미로왔다.
2022년에 비커밍스피시스의 지난 액션과 메니페스토를 담아 작은 책을 만든 적이 있는데 그때 우리는 어느 한 명의 미적 취향이나 스타일이 이 책 작업에 지나치게 반영되지 않았는지를 의심했다. 한 명의 숙련된 미적 취향으로 완성도를 높이는 것보다, 최대한 모두가 각자 가능한 방식으로 글을 쓰고 디자인하는데 참여하도록 하였다. 결국 책은 매 페이지마다 다른 디자인과 취향이 뒤죽박죽으로 반영된 독특한 모습이 되었다.
또 비커밍스피시스의 Lærkesletten 야생 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시의회의 미팅을 풍자한 생물들의 온라인 미팅 액션을 담은 필름을 Sjon 인류학 필름 페스티벌에서 만들어 주었던 적이 있었다. 이때에도 이 필름을 만드는 과정에서 유일하게 피드백했던 것은 콜렉티브 멤버 모두의 말과 모습이 다 골고루 담기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액션을 만들어갈 때 진행의 효율성을 위해 한 명두의 코디네이터가 이끌어 가도록 하지만 다수의 생각을 다 듣고 넓은 동의가 형성되야 하기 때문에, 모든 순간이 서로와 협상하는 의사결정과정 속에 있다. 또 다수의 미적, 퍼포먼스 취향 등을 다 포용하기 때문에 그 액션의 미적 스타일과 움직임은 일관되지 않고, 무수히 펼쳐져 있다.
지난 10년 간 예술계에서는 (인도네시아 콜렉티브인 루앙루파의 작업 세계와 또 그를 이은 2022년 카셀도큐멘타를 통해서) 공동체성, 다양한 존재들에 대한 돌봄과 포용성, 공동체성의 회복의 내러티브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 한 개인에게 요구되었던 효율성, 생산성, 그 생산성 아래 숨겨져 있던 재생산의 노동, 돌봄의 책임과 의무가 실제로 공동체와 나누어져야 한다는 것을 최근의 코로나 및 지구적 위기로 인해 다시 기억하게 되었다. 이 어려움을 같이 견뎌내고 수리해야 한다는 것이 피부에 와 닿으면서도 근대의 작가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현대의 예술계에서 이 공동체주의는 얼마만큼 실현가능하고 어떤 부분은 불가능할까라는 질문이 든다. 반면 이 덕분에 근대 예술에 뿌리를 두고 있는 현대 예술과 그 미학이 다르게 변화할 수 있다는 희망도 든다.
예술 공동체의 작업이 작품의 완성도를 고려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개개인의 다 다른 미적취향을 다 담고, 하나로 이어지지 않는 뒤죽박죽인 작업까지 허용할 수 있을까?
결론에 이르지 못한 어질어진 작품의 상태를 다양한 개인을 다 포용한, 어떤 척도로 재단되지 않고 모여있는 결과물로 음미할 수 있을까?
어쩌면 앞으로 이런 누더기 패치워크의 미학을 알아볼 수 있도록 우리의 눈을 훈련시켜야 할지도 모른다. 결과의 완벽함과 완성도를 보는 눈에서 과정과 포용의 가치를 더 알아보는 눈으로의 연습.
우리가 관객으로서, 예술가로서, 평론가로서 한 작품 결과물의 과정과 그 과정 속에서 관계하는 방식들을 보는 눈을 키울 수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시험지에 답이 맞고 틀렸고를 매기듯 그 작품을 평가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우리의 관계 속에서 그 작품은 계속 생성되고 자라게 될 것이다. 각자는 그 작품과 관련된 행위들에 반응할 책임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돌보는 행위자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