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in the Big City, 2024
<대도시의 사랑법> 원작소설을 읽은 사람이 영화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일까. 아마 결혼식 축가가 바뀐 비중이 높을 것 같다. 원작에서 흥수(노상현) 역할인 영이 재희(김고은)에게 불러주는 축가는 핑클의 ‘영원한 사랑’, 영화에서는 미쓰에이의 ‘Bad girl good girl’이다. ‘항상 나의 곁에 있어’ 달라고 약속하는 지고지순한 부탁은 ‘자신 없으면 저 뒤로’, ‘날 불안해하지 않는 남자를 찾는다’는 선언이 된다. 원작은 2019년에 출간됐다. 당시에도 지고지순과는 거리가 먼 주인공에 비추어 모순적인 웃음을 자아냈던 축가 선곡이 5년 만에 (보다 직설적이지만) 제자리를 찾은 듯한 느낌이다.
영화는 치밀한 분석보다는 각자의 감상에 빠져들게 한다. 친구를 만난 것 같은 익숙함 덕분이다. 주인공인 재희, 흥수가 익숙하다는 건 아니라 원작자와 동년배로 동일한 시대를 통과한 관객의 입장이다. 친숙함 뒤에는 부러움이 찾아온다.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는 어떨지 모르지만) 스스로는 어정쩡하게 놀고, 이도 저도 아니게 공부해 결국 별거 없는 사회인이 된 건 아닐까 하는 후회가 고개를 든다.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찾아낼 수 있었던 최적의 타이밍을 놓친 건 아닐까 하며 외면한 진실이 흥수와 재희를 보며 다시 피어오르며 부러움을 낳는다.
축가의 변경이 필연적이었으며 <대도시의 사랑법>이 대다수의 공감대를 불러올 수 있는 것도 아마 이 부분일 것이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우정을 쌓게 된 날. 클럽에서 나온 재희는 남자와 키스하고 있는 흥수를 발견한다. 재희는 흥수의 등짝을 후려치고는 한참 웃더니 별안간 팀플을 제안하고 술 한잔하러 가자고 말한다. 닭도리탕과 소주를 깔아둔 술집에서 흥수는 자신의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하냐 까칠하게 묻는다. 재희는 무심하게 대꾸한다. “네가 너인 게 어떻게 약점이 될 수 있냐?”고.
재희가 흥수에게 했던 말은 사실 본인에게 먼저 적용된다. 재희는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연애한다는 이유로 ‘걸레’ 취급을 받는다. 그 와중에 남자 보는 눈이 없어서 자주 봉변을 당하던 재희였다. 원치 않은 아이를 가져 임신 중단을 결정하며 눈물을 쏟은 일도 있었다. 그런 20대를 지나온 재희가 남편에게 ‘꼭 내게만 내 꿈을 맡기고 싶어’라는 메시지를 남기는 건 성장의 증거가 아닌 정체의 흔적이다. 겉모습만 보면서 한심한 여자로 보는 시선이 웃긴다는 변화가 옳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부러움과 후회보다 부끄러움이 크게 다가온다. 동일하게 00~10년대에 20대를 보냈지만, 나의 자리는 흥수와 재희는 아니었다. 고백하자면 오히려 그들을 이해할 수 없는 괴짜, 별종으로 단정하고 바깥으로 몰아내던 쪽에 가까웠다. 10여 년이라는 시차, 주인공들의 대학 생활과는 거리를 두고 있기에 <대도시의 사랑법>을 반짝이는 성장영화라 받아들일 수 있는 것뿐이다. 동시대를 사는 나였다면 영화 외적인 면을 들어 혹평을 남기지는 않았을까. 솔직히 자신할 수 없다.
국내의 영화 커뮤니티를 훑어보면 혹평의 주된 이유가 대체로 한 가지로 좁혀진다. 영화에서 왜 정상적인 남자가 등장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단체채팅방에서 여성의 외모를 품평하고, 몰래 바람을 피우고 심지어 데이트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이는 곧 여성은 절대적인 피해자고, 게이만 괜찮게 그려지는 게 정치적 올바름이냐는 비아냥으로 연결된다. 당시 남성 집단 저류에 깔려있던 비참한 수준의 인권 의식이 메신저를 이용한 딥페이크 범죄 등으로 오히려 한 단계 진화한 모습으로 재현되는 걸 보면 <대도시의 사랑법>이란 성장영화의 필요성이 더 도드라진다.
다른 방향으로 눈을 돌리자면 ‘데이트폭력이 커밍아웃만큼의 무게감이 없다는 지적(‘‘발칙한 퀴어영화’라기엔 너무 순진한 ‘대도시의 사랑법’, 여성신문)’에도 공감한다. 이슈의 우열을 가리는 건 아니다. 다만 데이트 폭력을 당한 재희를 수단으로 삼아 흥수의 소박한 커밍아웃으로 연결시켜 소비된 느낌이 아쉬울 수 있다는 측면은 이해가 된다. 신입생부터 치열한 취업준비를 하는 GenZ 대학생에게 일주일에 8일을 술 마시는 선배들의 철지난 무용담이 쉽게 받아들여질지도 의문이다. 정작 청춘영화가 필요한 청춘들에게 공감대를 사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든다.
지난 8월 대법원이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했다. 그러나 차별금지법, 동성혼을 반대한다는 보수단체 시위에 여전히 100만 명이 운집한다. 2014년 진행된 "동료, 친구, 친척 중에 게이, 레즈비언, 양성 아니면 트랜스젠더가 있나요?"라는 설문조사에 미국인 58%, 캐나다인 57%가 "예"라고 답했는데, 한국인은 4%만 "예"라고 답했다고 한다. 지구상에서 한국에만 유독 LGBT가 적을 리는 없다. 결혼이 사랑의 결실이나 반드시 넘어가야 할 인생의 다음 단계는 아니지만 재희는 어쨌든 새로운 장을 연다. 흥수는 10여 년간 살았던 소박한 원룸으로 돌아온 현실과도 무엇이 다른가.
무엇보다도 잘 알지도 못하는 걸 아는 척하며 써야 하는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빠져있으나, 그중에서도 까다로운 아이템 중 하나는 퀴어와 같은 정체성 이슈다. 가족에게도 커밍아웃하지 않은 흥수의 고민이 전반에 깔려있는 <대도시의 사랑법>을 리뷰하며 퀴어를 언급하지 않고 지나갈 수는 없는데 시스젠더 헤테로의 입장으로 이에 대해 판단을 내리는 것은 물론이고 감히 응원하느니 마니 말하는 것도 부담스럽다. 부디 이 리뷰 역시 누가 되지 않기를 조심스레 바라며 다소 늦게 도착한 <대도시의 사랑법>의 극장 관람을 적극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