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전서 02:09-15
디모데전서 02:09-15 선한 모습을 통한 구원의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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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선한 싸움에 대한 구체적인 권면으로 핍박하는 자들을 향하여 기도해야 하는 이유와 자세를 남자들을 중심으로 언급하고(2:1-8), 이번에는 믿지 않는 남편을 둔 아내(여자)들을 향하여 바른 행실을 통해서 남편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수고에 대해 당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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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의 큰 문맥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하는 문맥에 이어 2:1-8에서 먼저 남자들이 핍박하는 이들과의 갈등에서 승리하는 길을 권면한 이후에, 이와 같이(2:9의 ‘이와 같이’는 바로 믿음의 선한 싸움(1장~2:8)에 대한 부분을 이어 받는 것입니다) 여성들에게 문제가 되는 갈등의 상황을 다루고 있습니다. 특별히 본문에서 ‘남자’와 ‘여자’로 번역된 단어는 각각 ‘남편’과 ‘아내’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고, 두 부부사이의 갈등은 여자를 향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10절)이라는 표현으로 봐서 아내는 믿는 자이지만 남편은 믿음이 않는 자이기에 생길 수 있는 갈등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배경속에 본문을 이해해야만 난제(여자는 교회에서 사역자로 가르칠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현재 교회의 여성 사역자는 어떻게 보아야 하나? 해산이 어떻게 구원과 연결되는가?)가 되는 부분들의 오해를 줄일 수 있습니다. 또한 오늘 말씀과 베드로전서 3:1-6의 유사성을 고려해 보면 결국 본문의 갈등은 남녀 사이의 갈등이 아닌 아내와 남편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두 본문의 유사성 : 남편과 아내라는 표현을 씀, 아내의 순종과 정결한 행위를 강조, 머리와 옷치장에 대한 언급, 구약의 부부-아브라함과 사라, 아담과 하와-의 예를 들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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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0절 아내는 남편을 향하여 단정함, 소박함, 정절로써 단장하고 오직 선행으로 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서 마땅한 바입니다(적극적 권면).
아내들은 외모를 금이나 진주로 치장하고 값진 옷을 입어서 남편에게 잘 보이려 하기보다 단정하게 옷을 입고 소박함과 정절로 자신을 단장하며 선행으로 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행실로 더 적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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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차적으로 아내가 외모로 안목을 끌려하지 말고 정절과 선행으로 인정받도록 노력해야 할 대상은 밖에 있는 다른 외갓 남자들이기보다 남편이라고 봐야 합니다. 외모에 대한 치장등은 외갓 남자와의 관계에서 나타난 묘사라고 보기 보다는 오히려 아내와 남편 사이의 부부 관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남편을 둔 여성도가 남편에게 신뢰를 받기에 가장 적절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내는 이렇게 외모가 아닌 선한 행실을 통해서 남편에게 인정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아내)들이 마땅히 행한 모습입니다. 남편은 이런 아내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게 될 것이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아는 자리에 점점 나아 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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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는 가장 가까운 사이이기 외형적인 치장으로 가릴 수 없는 내면의 진실함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부부관계에서 생길 수 있는 갈등에 있어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들을 최소화하고 단정하게 옷을 입고 소박함과 정절로 자신을 단장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서 선한 행실을 하기에 힘쓰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성도는 마음의 할례를 받고 그리스도로 옷입고 진실함으로 행하는 것이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친밀한 사이일수록 더욱 가식없는 진실함이 요구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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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2절 아내는 남편을 가르치려하거나 주도하여 교회로 인도하려는 행위는 지양해야 합니다(소극적 권면).
아내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합니다. 아내가 가르치려하고 남편을 주관하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오직 조용할지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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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의 아데미신을 숭배하는 여사제들의 모습에서는 이와 같은 모습들이 보편화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영향들이 아내가 먼저 교회를 나와 하나님을 믿고 난 후에 믿지 않는 남편을 인도한다고 가르치려하고 남편을 주관하려고 무리하게 행하는 일은 정숙한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교회에서 여성들의 교사 행위를 금하는 본문으로 해석되는 것은 이런 정황들을 무시하고 문자에 얽매인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고전 14:34-36의 경우는 이방 종교와의 문화와 방언 등에 대한 무질서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고, 여기에 나오는 말-잡담이나 방언일 가능성-과 율법-일반법이나 세속법일 가능성-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바울 사도는 이미 다른 성경에서 여자들이 지도력을 발휘하여 가르치는 예가 있고 함께 동역하는 경우들도 있었습니다. 뵈뵈와 브리스길라와 유니아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교회 공동체보다 부부사이에서 특히 믿지 않는 남편을 둔 아내의 경우에 열심이 과하여 아직 가르칠 만한 자격이나 자질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강압적으로 남자를 가르치는 것을 통해 권위를 남용하여 오히려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조용히 순종하고 배우면서 오히려 선한 행실로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임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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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교만하지 않고 온유와 겸손으로 행하며 오래 참고,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며 견딥니다. 믿지 않는 가족과 친지를 향하여 기도하는 것처럼 행실에 있어서도 교만하거나 무례히 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겸손과 온유로 단장하고 선한 행실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가는 것이 추구해야 할 바른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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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14절 아내의 행실은 남편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권면의 이유 1).
아내들이 이렇게 행해야 하는 근거로서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았고, 여자가 먼저 속아 죄에 빠진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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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남편을 주관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로 아담과 하와 부부의 예를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권위가 남편에게 먼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질서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 부부의 범죄는 아내가 먼저 꾐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내가 잘못하면 남편도 함께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을 만큼 아내의 행실은 남편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에 있어서 아내의 행실이 미치는 영향을 고려한다면 남편의 권위를 무시하거나 잘못된 처신으로 인하여 부부가 함께 범죄하게 하거나 심각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기에 아내는 더욱 단정히 행하고 소박함과 정절로서 자기를 단장하고 선한 행실로 순종하며 배워가도록 한 것입니다.
# 13절에서 인용한 아담과 하와를 남녀의 대표로 보기보다 부부의 예로 봐야 하는 이유 : 13-14절에 있는 아담과 하와의 예는 12절을 뒷받침하려고 쓰였는데, 이 두 사람은 부부입니다. 신약성경에 아담이 홀로 인류 전체를 대표하는 경우로 쓰인 적은 있지만(롬 5:14; 고전 15:22, 45), 아담과 하와가 각각 남자와 여자의 대표로 등장한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의 동반 등장은 부부의 예로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참조. 엡 5:31). 바울은 부부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아담과 하와의 예를 제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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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아내하기 나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당대의 가부장적인 제도 하에서는 더더욱 이러한 행실이 부부관계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날에도 아내의 남편에 대한 권위 존중과 바른 처신 곧 선한 행실은 남편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첩경이 됩니다. 더 나아가 오늘 가정의 많은 부분을 책임지고 있는 아내의 행실은 남편 뿐 아니라 자녀들의 양육과 가정의 문화까지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기에 더더욱 아내의 지혜로운 처신이 요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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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절 아내의 정숙함으로 행하는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의 수고는 남편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게 됩니다(권면의 이유 2).
아내의 잘못된 행실이 남편을 범죄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면 반대로 아내의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는 해산의 수고는 남편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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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함’은 9절의 ‘정절’과 같은 단어입니다. 아내들의 처신에 따라 남편이 문제가 생길 수 있는 반면에 오히려 아내들의 선한 행실(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함)은 남편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14절과 15절은 서로 대비되고 있습니다. 아내가 행할 선한 행실을 함축적으로 바른 믿음과 온전한 사랑과 구별된 거룩함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선행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행실은 남편들이 하나님을 알아가게 되고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게 됨을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해산함’에 대한 표현을 ‘해산의 고통’으로 표현하고 이러한 유비를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의 개념으로 연결시킨 예가 갈라디아서 4:19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새롭게(참 구원을 얻는 자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을 ‘해산의 수고’라고 말합니다. 이 해산을 자신의 구원으로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구원에 자신이 고통스러운 노력을 감당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본문도 마찬가지 해산함은 아내의 몫이고 구원의 수혜자는 남편이 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믿는 아내가 권위적인 비신자 남편에게 그리스도인의 바른 모습을 보이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 고통의 결과는 놀랍게도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해산의 수고같이 남편이 구원의 길을 걸을 수 있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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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디 말보다 선한 행실이 더 강력한 영향력을 미칩니다. 언행일치된 믿음과, 진실한 사랑과 세상과 다른 행실(거룩함)이 결국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이러한 행실에는 많은 희생과 수고와 고통이 따릅니다. 해산의 수고를 생각하면 그 아픔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믿음의 선한 싸움으로 표현으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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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적과의 갈등 관계에서 승리할 수 있는 참 해결책은 ‘믿음의 선한 싸움’의 길이며, 반대자(원수)까지 사랑하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길을 가르치셨고, 보여 주셨으며, 승리로 확인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쉽지 않은 싸움이고 쉽게 할 수 없는 싸움입니다. 하지만 교회만이 할 수 있는 참된 싸움이고, 선한 싸움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은 이러한 점을 아주 실제적으로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실행하기 쉽지 않은 사랑의 난제가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그런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받았기에 우리도 이 믿음의 선한 싸움, 사랑의 난제를 실현할 수 있을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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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우리 믿음의 주요 사랑과 거룩함으로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주님의 거룩한 신부된 교회로 세워 주심을 감사하오며
귀한 가정 허락하심도 감사드립니다.
또한 우리를 축복의 통로로 세워 주셔서
뭇 영혼 구원 얻도록
선한 행실로 주님의 증인되게 하심도 감사드립니다.
부부관계와 여타의 비신자들과의 관계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있는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의 능력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로 옷입고
단정함과 소박함과 정절로 단장하면서
주님이 세우신 질서를 따라
권위와 지식을 남용하지 아니하고
더욱 구원으로 인도하는 일에 잘 사용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해산의 수고를
기꺼이 잘 감당할 수 있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