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후서 03:10-17
디모데후서 03:10-17 바른 삶과 온전한 지식을 추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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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세에 악인의 삶의 모습을 설명한 후에 바울은 바른 삶의 모습을 자신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고 그렇게 살아가는 일이 또한 고난이 수반됨을 짚고, 디모데에게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해야 하는 이유를 성경의 능력을 통해 권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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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줄묵상 : 경건하게 살고자 하여 박해를 받을지라도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말세에 하나님을 떠난 악인들의 모습은 자기를 사랑하며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들의 어리석음은 공동체의 어리석은 이들에게까지 미치지만 곧 드러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세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바울사도는 자신의 삶의 모범을 통해서 디모데에게 경건의 삶을 성경을 통해서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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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1절 박해의 여정에서도 주님이 구원하실 것을 믿으며 살아야 합니다.
바울의 가르침, 행실 그리고 삶의 방향들과 믿음, 그리고 교회와 사람들을 향하여 오래참음과 사랑과 인내, 외부적으로 오는 박해와 고난 무엇보다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디모데의 고향 루스드라에서 강한 박해들을 언급합니다. 이 모든 것을 디모데가 알고 있고, 또한 그런 상황에서 주님께서 건지셨음을 증언하고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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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함께한 선교여정에서 바울이 당한 일들을 고스란히 보고 함께 경험한 디모데, 무엇보다 고향 루스드라에게 돌에 맞아 죽었다고 버려졌던 바울이 다시 살아났던 그 사건의 현장에 아마도 디모데도 있었을 것으로 압니다.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어도 고향에서 바울사도가 당한 일들에 대해서도 소문을 들어 알고 있을 것이며 지난 수년 동안의 선교여정에서 가장 가까이에서 바울의 모든 삶의 내용들을 샅샅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생각들 믿음과 신학 그리고 사람들을 대하는 모습과 그들에 대한 생각들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었기에 바울이 당한 박해가 남다르지 않음을 디모데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다시 그 일들을 재확인하는 이유는 이 모든 삶이 결국 경건하게 살고 주님을 따라 살고 우리가 가야 할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앞서 악인의 길과 대조되는 모습을 몸소 살아온 삶의 내용, 이미 디모데도 알고 있는 내용들을 상기하면서 그것이 바울 자신과 앞으로 그길을 이어갈 디모데가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보여주고 있기에 이러한 바울의 회상에 대한 상기함은 디모데에게 묵직하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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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의 여정이 어떠한지, 말씀을 맡은 자로서, 주님의 몸된 성전이요 교회로서 과연 고백하고 간증할만한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이 있는지, 그리고 참으로 주님을 위하여 오래참음과 원수까지도 사랑함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인내와 박해와 고난 속에서도 생명의 위협을 받는 순간에도 여전히 우리를 구원하시고 이 모든 것들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평안할 수 있을까? 바울 스스로 2차 투옥은 더더욱 가택연금과 비교할 수 없는 좁은 로마의 감옥에서 지금 이 서신을 쓰면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바라는 마음은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이 서신을 묵상하고 있는 우리의 처지는 어떠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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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3절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경건하게 살고자하는 사람들은 박해를 받지만 악하게 사는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 악하여져서 다른 이들을 속이기도 하고 자신들도 속고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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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과 악의 대조는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궁극적으로 의인의 길은 형통하고 악인의 길은 망하는 것이지만 그 과정속에는 변수 내지는 역설이 있습니다. 먼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아가는 자들은 디모데와 같은 사역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주로 모시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세상의 가치와 사상과 세계관을 따르고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그것들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이들입니다.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는 시류에 편승한다면 그리스도인이 핍박이나 어려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약삭빠르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얼마든지 소위 성공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가치와 다른 것을 추구하고 세상과 역류하는 삶을 살아가기에 세상이 싫어합니다.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싫어하듯이 반드시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은 불편한 것입니다. 자신들의 부정과 삐뚫어짐이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신들의 어리석음과 자신들의 부족함과 속임이 드러나는 것이 부끄러우니 더욱 속이려하고, 자신들의 가면을 더욱 짙게 가려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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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다른 복음과 거짓 진리는 왜곡된 신앙의 모습을 양산하여 만사형통과 십자가 없는 영광과 무병장수와 부자복음과 번영의 복음에 빠져있습니다. 그래서 박해는 자신들이 잘못해서 받는데도 불구하고 의를 위해 핍박 받는 거라 착각하면서도 수렁에서 헤어나오질 못합니다. 왜곡된 복음인지도 인지도 못할 뿐더러, 설령 알더라도 그렇게 오래도록 믿고 설교하고 살아온 것이 아까워 자기부인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그냥 하던대로 믿던대로 살던대로 살겠노라 하면서 속고 속이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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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15절 바른 삶과 구원의 길은 성경을 통해서 배우며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말하며, 바울에게서 배운 신앙, 어려서부터 외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배운 거짓이 없는 믿음을 따라 살고, 무엇보다 성경을 통해 바른 복음을 따라 살아왔음을 확인하면서 다시한번 성경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 책이라고 정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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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가 바울을 통해서 배운 신앙의 전통은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오던 믿음이었습니다. 다시한번 바울은 이 사실을 디모데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다른 복음, 엉터리 지식과 속이는 자들의 왜곡된 복음을 분별하여 바울을 통해서 배운 것을 잘 알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디모데가 어려서부터 조모와 모친으로부터 성경을 통해서 거짓이 없는 믿음을 배웠다는 것을 서신의 초반부에 이어 다시 언급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교회 공동체도 함께 포함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15절에서 말하는 성경은 당대 신약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시기이지만 단순히 구약만을 말한다고 하기보다는 이미 형성된 교회와 전통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들이 회자되는 내용들을 포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야 15절 하반절에 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라고 하는 부분이 성경에 포함되는 가르침으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기서 성경은 구약뿐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고, 디모데의 조모와 모친을 통해서 배운 것을 토대로 교회 공동체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포함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우리가 예수를 믿는 ‘우리의 믿음’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딤후 2:1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라고 동일한 표현이 있는데 이 은혜는 우리가 가진 은혜가 아닌 ‘예수님의 은혜’로 소유격이 ‘예수님’인데 여기서 ‘믿음’을 우리의 믿음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우리가 ‘믿음’이라고 하는 단어에 대한 반사신경이 ‘예수를 믿는 우리의 믿음’으로 너무 교리화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문법적으로나 문맥적으로 여기서 ‘믿음’은 ‘그리스도 예수의 믿음(신실함)’으로 보는것이 더 타당합니다. 바울의 서신에서 ‘믿음’은 세 가지 용례(믿음, 믿음의 법, 예수 사건)로 쓰이는 점을 이제는 우리가 구분하여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세 가지 믿음의 용법 중에서 ‘예수 사건’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렇다면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다”(15b)는 말은 우리의 온전함과 구원이 결국 “예수님의 신실하신 구원 사역”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얻은 점이 더 강조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성경은 “예수님의 그리스(메시아)도 되심”과 “그리스도의 신실하신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어 하나님을 믿는 백성으로 거듭나고, 이 땅에서 하나님을 알고 섬기며 따라 살아가는 지혜로운 백성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복음과 믿음과 구원에 대한 이해(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다시한번 성경을 통해서 점검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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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전통과 신비적 경험을 통해서도 배우지만 무엇보다 성경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교회는 바른 신학적 관점과 건전한 해석학을 통해서 성경을 바르게 읽고 해석하고 적용해 가는 것을 가르치고 배우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배운 것을 토대로 경험되는 신비적 경험들을 성경을 기준으로 잘 분별하며 균형있게 우리의 신앙을 이어갈 때 바르고 건강한 신앙인으로 자라가고 성숙해 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거짓 복음을 가지고 속이는 자들을 분별하기 위해서 우리가 신앙을 성경(검증된 전통과 신비적 경험들도 포함해서)을 통해서 어찌 되었건 잘 배워야 하는 것과, 그렇게 배우고 확신 된 신앙 위에 바르게 살아가야 한다고, 그것이 곧 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렇게 부지런히 신앙을 성경을 통해서 배우고 있으며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채워가고 있는지요? - 참고로 성경을 배우는 것의 핵심은 성경을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며,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것은 또한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가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고 묵상하고 배우고 읽고 먹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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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17절 온전한 사람,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성경을 통해 갖출 수 있음을 알고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이제 성경의 저자와 유익에 대해 말하면서 그런 성경을 계속 배워야 하는 목적이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으로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기 위함이라고 피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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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바울은 성경을 읽고 배우고 성경의 기반 위에 신앙이 자라가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성경의 중요성과 배움에 대해 강조하기 위해서 원저자와 성경을 교육하는 내용과 목적을 함축적으로 제시합니다. ‘하나님의 감동’이라는 말에는 원저자가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감동’이라는 인간 저자의 역할이 배제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성경이 하나님께서 계시하시고 허락하시고 주신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이 성경을 통해서 얻는 유익은 교훈, 책망, 바르게 함, 의로 교육하기라고 말합니다. 교훈과 책망은 목자의 지팡이와 막대기와 같은 역할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르게 살고 엇나갈 때는 교정해 주시는 역할입니다. 바르게 신앙하고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신대로 득의(得義)한 삶 곧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만을 신앙하며 순종하며 동행하는 삶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성경을 통해 배운 신앙을 통해 결국 목적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는 것”과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한마디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온전케 함”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하나님의 구원이 결국 죄인된 우리를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새 사람, 새 백성, 새 인류, 새 이스라엘로 새롭게 창조 하심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으로 빚어지고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선한 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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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신 구속의 사역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 사람 새 피조물 새 백성 된 것이니 우리가 날마다 이 성경을 상고하고 즐거이 묵상하며 그 말씀으로 더욱 하나님을 온전히 알아가고, 그 말씀이 나의 숨결이 되고, 생명이 되고, 일상이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빚어가야 할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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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우리를 새 사람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으로 구원하여 주신 은혜를 인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기 위하여
우리에게 성경을 주셔서
날마다 영생을 얻는 줄 믿고 상고하며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할 수 있는 지혜로 충만케 하옵소서.
말씀을 따라 경건하게 사는 길에
많은 어려움과 박해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바른 믿음의 삶을 인내로 경주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언행심사가 주의 거룩한 백성으로
부족함 없게 하옵시며
말씀으로 우리를 빚으시는 그 손길을
즐거이 순종하게 하옵소서.
거짓 복음, 다른 복음, 왜곡된 복음을 구분할 수 있는
바른 복음을 배우고 익히고 세워가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