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7:1-9
시편 137:1-9 바벨론 포로의 노래 : 시온에 대한 애도와 공의의 심판을 향한 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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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이 유프라테스 강 지류 강변에 앉아 폐허가 된 예루살렘(시온)을 기억하며 슬피 울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쁨의 예배에 사용하던 악기인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어두었고, 그들을 사로잡은 압제자들이 시온의 찬양을 모독적으로 부르라고 요구하자 이를 단호히 거부합니다. 시인은 예루살렘을 잊지 않겠다는 맹세(자기 저주 기원문)를 선포하며,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멸망을 도왔던 에돔 자손과 바벨론에 대하여 하나님의 공의로운 보응이 임하기를 간절히 탄원하는 저주 기도로 마무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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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문화적 배경 : 시편 137편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기에 처해 있을 때 지어진 노래입니다. 기원전 586년에 남유다가 멸망하고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강제 이주되었습니다. 포로들은 유프라테스 강 등의 강변에 모여 고향 상실의 슬픔을 나누었고, 압제자들은 이들에게 성전 예배용 찬양인 시온 노래를 부르라고 요구하며 조롱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유다인을 멸시하는 것을 넘어,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로 인식되었습니다. 이 시는 포로된 유대인들의 깊은 슬픔과 비통함을 반영하며(애가 1-2장 참조), 이스라엘이 겪은 비극은 그들의 불순종과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결과였습니다.
신학적/정경적 배경 : 이 시편은 시온에 대한 애착과 하나님의 공의라는 두 가지 핵심 신학을 중심으로 합니다. 시인은 바벨론에 대한 저주를 통해 개인적인 복수심을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공의에 입각하여 악인들에게 합당한 보응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합니다. 이 시는 시온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바벨론에 대한 지독한 저주를 담고 있어 '두 성의 노래'라는 별명을 지니며, 시온을 기억하고 예배의 거룩성을 지키는 것이 이방 땅에서의 신앙의 절개임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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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절 바벨론 강변에서 시온을 기억하며 예배의 상실을 애통하다
하나님은 고통과 상실 속에서 그 백성이 참된 예배의 가치를 깨닫도록 이끄시는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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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강변에 앉아서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들은 슬픔과 비통함 때문에 기쁨의 찬양을 드리던 수금(킨노르, 비파)을 버드나무 위에 매달아 놓았습니다. 그들을 사로잡은 자들, 곧 괴롭히는 압제자들이 이스라엘의 비참함을 조롱하며 시온의 노래 중 일부를 불러 기쁨을 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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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아서... 울었도다'는 포로된 유대인들의 비통하고 애절한 심정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특히 '시온을 기억하며'의 '기억하다'(자카르)는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죄악으로 인해 성소가 파괴되고 예배의 특권을 잃었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성찰하며 통곡했음을 보여주며, 이는 회개의 의미를 내포합니다.
'수금을 걸었나니'는 성전 예배에 사용되던 악기를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걸었나니'(탈라)는 사람을 처형할 때도 사용되는 동사로, 수금이 마치 처형당한 죄수처럼 버드나무에 매달려 있다는 강렬한 비유를 통해, 이스라엘의 기쁨의 찬양이 중단되고 장송곡과 같은 비통함 속에 있음을 극적으로 나타냅니다.
바벨론인들이 '시온 노래'를 부르라고 요구한 것은 여호와께만 돌려야 할 찬양을 세속적인 흥을 돋우는 데 사용하려는 신성모독적 행위였고, 이는 포로들에게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비방하는 것과 같은 신앙적인 모욕이었습니다. 시인은 이러한 극한 고통 속에서 오히려 예배의 진정한 거룩함과 소중함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겪은 '예배의 상실'의 고난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와 예배의 가치를 재인식하게 했습니다. 이는 신약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고난은 종종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점검하게 하며, 이전에 깨닫지 못했던 '숨은 죄악'을 알게 하고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게 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육체적이고 영적인 갈급함(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간절히 사모하며 성소(예배)로 나아가기를 갈망하도록 이끄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그분의 피로 하나님과의 만남(예배)을 자유롭게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찬양과 예배는 이처럼 귀한 은총이기에, 세상의 어떤 유혹이나 조롱 앞에서도 그 순수성을 지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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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에서 '바벨론 강변'에 앉아 울게 만드는 고난(질병, 경제적 파산, 관계 단절 등)은 예배의 도구인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결과에 집중하기보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말씀을 준행하게 된 변화 자체를 긍정적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예배와 감사가 사라지고 영적 침체에 빠졌을 때, 우리는 이스라엘처럼 '시온을 기억하는 울음', 곧 회개와 갈망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이는 모든 수고와 염려를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고 '잠을 주시는' 평안(평안한 영혼)을 얻는 비결이 됩니다.
현대 사회는 기독교의 가치관(시온 노래)을 흥미 위주로 소비하거나 비난하는 '바벨론의 조롱'이 만연해 있습니다. 교회는 예배의 공적인 장소에서,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온전하고 합당한 찬양의 중요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과학기술과 물질문명의 발달로 인간이 스스로를 하나님 자리에 두려 하는 교만한 시대에, 교회는 창조주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엄위하심을 선포함으로써, 인간의 모든 수고가 하나님 없이는 헛될 수밖에 없음을 일깨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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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절 이방 땅의 조롱 속에서 시온(예배)을 향한 신앙의 절개를 맹세하다
하나님은 세상의 조롱과 압력에도 흔들림 없이 그분의 거룩성을 지키도록 요구하시는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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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들은 이국 땅에서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시인은 예루살렘을 잊지 않겠다는 충성의 맹세를 합니다. 만약 예루살렘을 잊는다면 자신의 오른손이 재주를 잃을 것이며, 예루살렘을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사랑하지 않는다면 혀가 입천장에 붙을 것이라는 극단적인 자기 저주를 통해 시온에 대한 확고한 사랑을 표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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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는 바벨론인들의 모독적인 요구에 대한 강력한 부정과 신앙적 저항을 보여줍니다. 여호와의 노래는 언약을 성실하게 이행하시고 구원과 축복을 베푸시는 하나님(여호와)께 대한 감사와 찬양이며, 이 거룩한 찬양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교도의 땅에서 세상의 유흥거리로 전락될 수 없다는 거룩한 자존심의 표현입니다.
5절과 6절의 맹세는 예루살렘(성전과 예배)을 향한 시인의 절대적인 충성심을 드러냅니다.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지로다'는 음악가로서의 재능을 상실하는, '혀가 입천장에 붙을지로다'는 벙어리가 되어 다시는 찬양할 수 없게 되는 잔혹한 저주입니다. 시인은 이처럼 '배수의 진'을 치며 신앙의 절개를 지키고자 결단했습니다. 여기서 예루살렘을 '제일 즐거워하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임재의 장소에 대한 가장 높은 가치 부여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모범은 이방 땅에서 포로 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교도들의 문화에 굴하지 않고 뜻을 정하여 순전한 신앙을 지켰던 다니엘과 세 친구의 모습 또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만을 의지하겠다는 다윗의 굳건한 신뢰(시 109:1)와 일맥상통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에게 거룩함을 구별하고 세상과의 타협을 거부하도록 요구하십니다. 신약 시대에 와서도 성도는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아하브) 은 세상의 핍박이나 유혹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주의 법도를 끝까지 고수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세상에서 성공과 번영을 얻는 것(세상적인 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사는 것, 곧 하나님을 경외하며 바른 길을 걷는 것 자체가 참된 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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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바벨론'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을 향한 충성심을 지키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결단'과 '맹세'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개인의 욕망, 교만, 지나친 명성 탐욕 등 (인간이 추구해서는 안 될 일들)이 우리의 '시온' 사랑을 가로막지 않도록, 말씀을 통해 발걸음을 굳게 세우고 죄악의 지배를 받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는 세속적인 즐거움보다 하나님과의 교제(예배, 기도)를 가장 즐거워하는 가치로 여기는 신앙의 우선순위를 확립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 없이도 견고한 집을 세울 수 있다고 믿는 인본주의적 환상에 빠진 세상에,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낮추는 삶을 살도록 도전해야 합니다. 또한 교회가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 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의, 공의, 인자하심, 진실)에 합당한 영광을 돌릴 때, 세상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참된 능력을 깨닫고 그분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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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9절 예루살렘의 멸망자들을 향한 공의로운 보응을 간구하다
하나님은 악인들의 잔혹한 불의를 잊지 않으시며 반드시 공의로운 심판을 행하시는 엄위하신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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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하나님께 예루살렘 멸망 시에 "훼파하라, 훼파하라, 그 기초까지 훼파하라"고 외치며 멸망자들을 격려했던 에돔 자손의 행위를 기억하시고 보복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이어서 바벨론 성읍(황폐할 바벨론의 딸)을 향해 저주를 선포하며, 바벨론이 유다에게 행한 보응을 갚는 자에게 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바벨론의 어린아이들이 반석에 메어침을 당하는 잔혹한 보복을 당할 것을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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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저주 기원은 포로된 유대인들의 극한 슬픔과 비통함 속에서 나왔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기억해 달라'고 간구함으로써, 악인들의 잔혹함이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반드시 심판받아야 할 행위임을 호소합니다. 에돔은 남유다가 멸망할 때 즐거워하며 멸망을 부추긴 자들로, '훼파하라'(아루)는 예루살렘을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완전히 약탈하고 비우라는 의미의 잔혹한 명령형 동사입니다.
8절의 '네게 갚는 자가 유복하리로다'에서 사용된 '유복하리로다'(아쉬레)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바른 길을 걷는 자에게 선언되는 복입니다. 이 표현을 바벨론에 대한 저주에 사용함으로써, 시인은 바벨론의 멸망이 개인적 복수가 아닌, 하나님의 공의(義)를 실현하는 행위이며, 하나님의 뜻에 입각한 바른 길임을 강조합니다. 바벨론의 멸망은 이미 하나님의 예언(렘 50:29; 51:6)을 통해 분명히 예정된 일이었습니다.
9절의 어린아이를 반석에 메어치는 극도로 잔혹한 보복의 기원은 바벨론이 유다에게 행했던 동일한 잔혹한 행위에 대한 보복(동해 보복법)의 개념을 담고 있으며, 이는 악인들이 뿌리째 뽑히고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될 것이라는 시인의 확신을 반영합니다.
구약의 저주시는 개인적 원한이 아닌, 하나님의 절대적인 공의와 심판의 확실성에 대한 신뢰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은 불의를 행하지도, 용납하지도 않으시는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악인은 구원과 관계가 멀리 있으며,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율례를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도들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없어졌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이시며, 모든 권세와 통치는 그분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모든 악인에게 임할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의 부조리 속에서도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의심하지 말고, 우리의 삶의 궁극적인 승리는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을 통해서 온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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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세상에서 억울한 일, 부당한 대우, 악인의 훼방과 공격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이러한 고통을 겪는 동안에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공의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복수하거나 분노하는 대신, 하나님의 주권에 모든 심판을 맡기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성도는 자신의 죄성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강한 영혼을 구해야 합니다.
교회와 사회가 직면한 불의한 권력과 조직적인 악행들은 이스라엘을 황폐케 한 '에돔'과 '바벨론'의 재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권력의 허무함을 지적하고, 세상 모든 권세의 출처가 하나님께 있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될 때까지, 세상 가운데 의와 진실만을 붙들고, 하나님이 의로운 재판장으로서 불의한 자를 심판하시고,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을 보호하실 것을 확신하며 인내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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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둠의 기도
공의와 인자하심의 하나님,
저희가 바벨론 강변에 앉아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던
시인의 애통한 심정을 나눕니다.
죄로 인해 예배의 기쁨을 잃고 영적 비통함 속에 수금을 걸어두었던
저희의 연약함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께서 그 백성들이 고난 속에서도 참된 예배의 가치를 깨닫고,
세상의 조롱 속에서 거룩한 신앙의 절개를 굳게 지키도록 이끄심에 감사드립니다.
이 땅에서 물질만능과 불의가 득세하는 '바벨론'의 유혹 앞에서 타협하지 않게 하시고,
예루살렘을 가장 즐거워했던 시인처럼
주의 이름을 저희의 가장 큰 기쁨으로 삼아,
순전한 신앙과 거룩한 자존심을 지켜내게 하옵소서.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저희를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
악인들의 잔혹함과 불의를 심판하시는 주의 공의를 확신하며,
저희의 모든 억울함과 탄원을 주님께 맡깁니다.
저희가 불의한 세상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의와 진실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 가운데 온전히 실현될 것을
기대하는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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