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은 월드컵만 바라보며 4년을 기다렸다
드디어 기다리던 그 날이 왔다. 4년에 한 번 찾아오는 한 달의 축제. 누군가에겐 그저 세계선수권이겠지만, 내게는 꿈과 희망, 그리고 열정이 넘치는 전쟁터다. 월드컵, 월드컵이 드디어 내 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2002가 낳은 또다른 '월드컵 키드'
월드컵을 처음 접한 때가 2002년이었다. 고작 초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그 때는 뭣도 모르고 축구선수라는 꿈을 품었더랬다. 길거리는 온통 2002 로고로 가득했고,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2002년을 향한 기대감을 부풀렸다.
그 시절이 아니었으면 내가 이렇게까지 월드컵에 미쳤을까. 나는 그 때 스포츠로 느낄 수 있는 희로애락을 모두 체험했다. 한국의 월드컵 잔혹사도 모르면서, 한 단계 올라갈 때마다 미친듯이 소리치고 어른들과 부둥켜 안았다. 2002년의 모든 순간은 영구보존 되어 머릿속 미이라로 남아있다.
안정환이 이탈리아의 골망을 훔칠 때, 광화문의 군중들은 말 그대로 뒤집어졌고 귀가하는 길에도 연신 대한민국을 외쳐댔다. 자동차는 리듬에 맞춰 경적을 울렸으며, 뉴스는 한 시간을 모조리 대한민국 월드컵 8강으로 채웠다. 홍명보가 4강을 쏘아 올린 토요일 대낮에는, 희멀건 동네를 빨갛게 메우는 응원단이 등장해 텅 빈 거리를 연신 대한민국 함성으로 물들였다. 조용하던 동네엔 북소리가 가득했다.
우승이 얼마나 꿈같은 일인 지 그 때는 몰랐다. 독일전에 지고는 눈물범벅이 되어 일기를 끄적였다. 우리는 폴란드,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를 꺾고 (순서를 잘못 적었다) 4강까지 왔으며,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업적이라고. 그리고 4년 뒤엔 피파랭킹이 5위는 돼있을 거라고. 그 때의 일기장은 눈물 마른 자국 그대로 서랍에 고이 보관되어 있다. 지금은 돌아가신 담임선생님이, 그래 분명 한국의 피파랭킹은 많이 올라갈 거라고 일기장에 적으셨었다.
16년이 지난 지금은 너무도 조용하다.
6월초부터, 매일 월드컵 비디오를 챙겨보며 예열을 마친 내가 민망해질 정도다.
축구를 순수하게 만들 수 있는 단 하나의 존재
나는 월드컵이 모두를 순수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도구라고 생각한다. 세계인의 관심을 가장 많이 받는 대회이기도 하지만, 선수들 또한 오로지 국가와 자신의 명예를 위해 몸을 내던지기 때문이다. 2002년이 가장 좋은 예시였다. 2002년엔 모든 국민이 감정을 함께 나누며, 죽자사자 달려드는 선수들을 받쳐줬었다.
그 뒤로 나는 모든 팀들에게 감정이입을 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언더독의 반란이 일어나기라도 하면 유튜브로 골장면과 반응을 몇 번씩 돌려보며 그 감정을 체감했다. 나는 누구보다 그 느낌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저 선수들은 얼마나 기쁠까, 국민들은 얼마나 기쁠까. 그런 상상을 하다 보면 괜스레 나조차도 기분이 좋아지는 기현상이었다.
선수들이 눈에 살기를 띠며 상대에게 달려드는 모습. 자신에게 급료를 주는 프로팀에서의 모습과 사뭇 다르다. 월드컵은 오직 책임감과 사명감만을 갖고 돌진하는 무대였다. 그간 얼마나 많은 선수가 월드컵이라는 무대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 했는가. 2018년에도, 이탈리아 선수들은 울었고 스웨덴 선수들은 스튜디오까지 부수며 기쁨을 표출했다. 월드컵 선수들에게 축구는 직장이 아니었다. 기쁨이고 영광인 동시에 사명이었다.
메시가 골든볼을 받고도 고개를 숙이고, 호날두가 선수생명을 위협하는 부상을 안고도 배째라며 나가는 무대. 그것이 바로 월드컵이었다. 모든 경기엔 이야기가 있고 그 속엔 또 다른 사연이 있다. 월드컵은 축구를 보는 게 아니고, 국가의 사연과 간절함을 보는 무대다. 이것이 내가 월드컵을 놓을 수 없는 이유고, 나아가 프로축구보다 국가대항전을 더욱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참가국을 관찰하며 축제를 순수하게 즐기길
나 또한 그렇지만, 대한민국 대표팀을 향한 기대가 이전보다 많이 낮아진 게 사실이다. 일거수일투족에 시비를 걸고 욕설을 장전하는 팬 또한 많은데, 나는 그것보다는 월드컵 자체를 즐기고 싶다.
한국이 아니더라도 볼 나라는 많다. 브라질, 프랑스 등의 초강국이 아니더라도 사우디아라비아, 파나마 등이 있다. 상대적 약체가 사명감 하나로만 뭉쳐 강팀을 깨부수는 모습. 약육강식을 역전 시키는 통쾌한 드라마가 한 달 간 우리 눈 앞에 펼쳐진다. 나는 이 대회를 놓칠 생각이 없고, 가능한 전 경기를 챙겨보며 사연과 결말을 관찰할 생각이다.
물론, 2002년 이래 최고의 언더독으로 위치한 대한민국의 반란도 간절히 바란다. 이번만큼은 왠지 16강 가면 눈물이 날 것 같다. 슬픔의 눈물이 아닌 기쁨의 눈물. 미약하게나마 가능성을 걸고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을 외칠 테다.
잃을 것 없는 약자가 눈에 불을 켜고 하이에나를 물어뜯는 모습. 그런 통쾌한 반란이 다시 한 번 일어나길 간절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