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월드컵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나
스웨덴전이 하루 남았다. 축구 보면서 치맥이니 뭐니 하지만 한국 경기만 되면 그것조차 할 수 없다. 매 순간 몸을 가만히 있지 못 하고 배배 꼬아야 하기 때문. 지난 아시안컵 결승 때가 그랬는데, 나름 기분 낸다고 치킨을 시켜놓고 몇 조각 먹지도 못한 기억이다.
남은 시간을 카운트 해야 하는 지금. 대한민국 대표팀의 역대 월드컵 득점루트를 분석해 봤다. 귀가 아프도록 강조하는 세트피스가 도대체 뭔지. 그리고 어떤 득점루트가 월드컵에서 가장 효과적이었는 지 알기 위해서.
한국은 2014년 이전까지 6회 연속 직접프리킥 골을 기록한 유일한 팀이었고, 이 기록은 한국이 그간 얼마나 뛰어난 프리키커를 다수 보유했는 지 설명하는 명확한 지표가 된다. 대한민국이 월드컵 첫 골을 터뜨린 1986년 이래, 32년간 기록한 골 갯수는 서른 하나였고 이 중 직접프리킥이 대회 당 하나 씩 총 여섯 개였다.
5분의 1 가까운 골이 직접프리킥이었던 대한민국의 월드컵이다. 비율로 따지면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높다. 직접프리킥은 답보 상태의 경기를 한 방에 풀어 버리는 쳥량제 역할을 하며, 때로는 경기 전부를 뒤집는 결정타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 기록은 소중하다. 이번 월드컵에서도 정우영이나 손흥민의 한 방을 기대해 볼만 하다.
1990 월드컵 - 황보관 (2차전, 동점골)
1994 월드컵 - 홍명보 (1차전, 추격골)
1998 월드컵 - 하석주 (1차전, 선제골)
2002 월드컵 - 이을용 (3-4위전, 동점골)
2006 월드컵 - 이천수 (1차전, 동점골)
2010 월드컵 - 박주영 (3차전, 역전골)
94년의 홍명보를 제외하고는 모두 팀에게 천군만마와 같은 골이었고, 홍명보의 골마저도 결국 극적인 2:2 무승부의 발판이 되었으니 프리킥은 우리의 숨겨진 비밀병기로 봐도 좋다. 프리킥을 가장 잘 사용한 최근의 예로는 2010 일본이 있는데, 일본은 조별리그 3차전에서 덴마크를 상대로 혼다와 엔도가 연이어 프리킥을 꽂아 2:0으로 게임을 사실상 끝내버린 바 있었다. 스웨덴전에서도 얼마든지 터질 수 있는 게 프리킥이다. 프리킥의 절반이 1차전에 나온 지라 더욱 기대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신태용 감독은 스웨덴전을 앞두고 "세트피스는 절대 비밀"이라며 전략을 함구했다. 여기서 세트피스는 코너킥과 프리킥 등을 포함한 모든 데드볼 상황에서의 '약속된 플레이'를 일컫는데, 그런 측면에서 개개인의 기량에 의존하는 직접프리킥과는 약간 다르다. 이전처럼 걸출한 프리키커가 없는 한국에겐 이 또한 매력적인 득점루트다. 역대 월드컵 득점 서른 하나 중 세트피스가 차지하는 비율을 살펴보자.
1986 월드컵 - 김종부 (2차전, 동점골)
1986 월드컵 - 허정무 (3차전, 추격골)
1998 월드컵 - 유상철 (3차전, 동점골)
2002 월드컵 - 안정환 (2차전, 동점골)
2002 월드컵 - 박지성 (3차전, 선제골)
2010 월드컵 - 이정수 (1차전, 선제골)
2010 월드컵 - 이정수 (3차전, 동점골)
2010 월드컵 - 이청용 (16강전, 동점골)
여덟 골이다. 그 중 다섯 개가 동점골이었고, 하나가 추격골이었다. 한국에게 세트피스는 유독 뒤지는 상황에서 효과가 좋았는데, 개인적으로는 긴장이 풀린 상대가 가장 빈틈을 보이는 게 세트피스 상황이 아니었나 라는 생각을 한다. 2010년의 대한민국은 세트피스를 이용해서 16강 쾌거를 이뤘고, 우루과이를 상대로도 끝까지 선전하며 세계의 박수를 받았다. 세트피스 골이 터져나온 월드컵은 모두 결과가 좋았고, 98년 또한 골이 터진 경기는 비겼다. 1986년도 32년 만의 출전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선전이라고 평가 받았다. 꾸준함에 있어선 직접프리킥에 비할 바 못 되지만, 한 번 터진다면 성공을 보장하는 게 바로 세트피스 골이라고 볼 수 있겠다.
서른 하나 중 열네 개의 골이 데드볼 상황에서의 득점이었다. 티키타카 같은 낭만적인 축구가 눈정화에 도움이 됨은 분명하지만, 대한민국에게 낭만은 남의 얘기였고 꿈 같은 소리와도 같았다. 세계를 상대로 '아름다운 축구'를 펼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말이었다.
한국은 어렵사리 만들어진 기회도 허무하게 놓치곤 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의 중거리슛으로 재미를 본 적이 많았다. 직접프리킥의 계보와 궤를 같이 하는 한국의 중거리슛 역사 또한, 한국의 슈팅능력이 세계에 비교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
*이 글에서 중거리골의 기준은 '페널티 박스 바깥에서의 골'
1986 월드컵 - 박창선 (1차전, 추격골)
1986 월드컵 - 최순호 (3차전, 추격골)
1994 월드컵 - 홍명보 (3차전, 추격골)
2002 월드컵 - 유상철 (1차전, 추가골)
2002 월드컵 - 송종국 (3-4위전, 추격골)
2006 월드컵 - 안정환 (1차전, 역전골)
2014 월드컵 - 이근호 (1차전, 선제골)
나는 경기를 볼 때마다 기회 생기면 때리라고 외치는데,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이 세계를 상대로 '완벽한 기회'를 만든 적은 거의 없었다. 틈이 생긴 것 같아 때리고 본 중거리슛이 지난 32년간 상당한 효과를 보았고, 때로는 골키퍼의 실수를 유발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이 월드컵 역사에서 얻어낸 페널티킥 기회는 모두 놓쳤는데 (승부차기 제외), 막상 프리킥과 중거리슛 골은 이렇게 많은 걸 보면 좀 돌연변이 같다는 생각도 든다.
대한민국은 약팀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30년 전에는 더욱 그랬다. 그래서 틈만 보이면 중거리슛으로 재미를 봤고, 끌려가는 경기에 이를 유난히도 잘 써먹었다. 중거리슛은 분위기 반전용으로는 최고다. 2002년의 홍명보나, 지난 대회에서의 기성용이 위협적인 중거리슛으로 말린 경기를 환기한 기억이 난다.
지난 32년간, 단 10득점이 페널티 박스 안에서 이루어졌다. 대한민국은 전형적인 약팀의 길을 걸었지만, 동시에 가장 효과적인 득점루트를 개척하며 세계 강호들에게 다섯 번 이기고 아홉 번 비겼다. 나머지 11득점을 살펴보면,
1994 월드컵 - 서정원 (1차전, 동점골)
1994 월드컵 - 황선홍 (3차전, 추격골)
2002 월드컵 - 황선홍 (1차전, 선제골)
2002 월드컵 - 설기현 (16강전, 동점골)
2002 월드컵 - 안정환 (16강전, 역전골)
2006 월드컵 - 박지성 (2차전, 동점골)
2010 월드컵 - 박지성 (1차전, 추가골)
2010 월드컵 - 이청용 (2차전, 추격골)
2014 월드컵 - 손흥민 (2차전, 추격골)
2014 월드컵 - 구자철 (2차전, 추격골)
21세기 이후로 여덟 골이나 몰려있음을 알 수 있다. 대한민국이 21세기 이후로 본격적인 강호로 도약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열 골을 카테고리별로 나눠보면,
약속된 플레이 - 서정원 (1994), 황선홍 (2002), 설기현 (2002), 박지성 (2006)
중원에서의 킬패스로 인한 득점 - 황선홍 (1994)
크로스에 이은 헤딩골 - 안정환 (2002)
수비의 실수로 인한 개인기량 득점 - 박지성 (2010), 이청용 (2010)
한 번에 전방으로 연결하는 소위 '뻥축구'로 인한 득점 - 손흥민 (2014), 구자철 (2014)
이 정도쯤 되겠다. 추격에 바쁜 2014년에는 뻥축구가 도드라졌으며, 2010년에는 그리스와 아르헨티나 수비의 실수를 틈탄 박지성과 이청용의 벼락 같은 골이 있었다. 이를 제외한 여섯 골 가운데 세 골은 2002년에 만들어졌으며, 나머지 세 골은 1994년과 2006년에 나왔다.
2002년의 대한민국은 1년 반의 합숙을 거쳐 사실상 클럽팀 같은 팀워크를 갖고 있었다. 2002년의 기록을 뺀다고 하면, 약속된 플레이는 원정 월드컵에서 제 기능을 십분 발휘하지 못 했다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득점루트는 대다수가 세트피스와 중거리슛에 몰려 있으며, 나머지 필드골 또한 수비실수를 빼면 뻥축구와 크로스, 긴 킬패스가 전부였다. 한국에게 짧은 패스는 맞지 않는 옷이었다. 굵직한 축구, 이번에도 세계를 상대로 대한민국의 강점을 유감없이 발휘해 승리를 가져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