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월드컵 결승을 주목해야 할 이유
크로아티아가 월드컵 결승에 갔다. 16강에서 덴마크를, 8강에서 개최국 러시아를, 4강에서 잉글랜드를 꺾었다. 인구 400만 짜리 나라가 일으킨 거대한 기적에, 나를 비롯한 전세계가 열광했다. 그러나 크로아티아를 기다리는 건 우승후보를 연이어 격파한 프랑스. 결승이니까 당연하지만, 프랑스와 크로아티아에게는 꼭 이겨야만 할 각자의 이유가 있다. 월드컵 결승전에 감정을 잔뜩 이입할 수 있는 수만 가지 이유. 그 중 양국을 대표하는 몇 가지만 추려서 정리해봤다.
크로아티아는 말 그대로 좀비 상태다. 어떤 기사는 크로아티아의 현 상태를 이렇게 설명했다.
'한 명이 없는데, 한 경기를 더 뛰었고, 하루를 덜 쉰다'
크로아티아의 공격수 칼리니치는 조별리그 1차전, 교체투입을 거부했다가 대표팀에서 쫓겨났다. 다시 돌아오라는 권고가 있었으나 이를 무시하고 조국을 어렵게 만들었다. 다른 나라보다 한 명 적은 스물 두 명의 엔트리. 이 상태로 크로아티아는 세 경기 연달아 30분 연장을 뛰었고, 결국 남들보다 한 경기를 더 뛴 셈이 됐다. 그리고 일정상 결승 상대인 프랑스보다 하루를 덜 쉬게 됐다.
당장 준결승 잉글랜드전부터 크로아티아의 승리를 예상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2002년의 한국 대표팀을 떠올려 보자. 연이은 연장이 미치는 악영향은 너무나 자명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꺾어놓고도, 당시를 기준으로 세 팀 중 가장 떨어진다던 독일에게 패배했다. 연장전을 가진 팀의 움직임은 그 다음 경기에서 확연히 둔해졌다. 소위 말해, '머리는 어떻게 움직이는 지 알지만 몸이 그를 따라가지 못 하는' 현상이었다.
크로아티아도 그랬다. 러시아전 연장부터 기어다니기 시작하더니, 잉글랜드전 전반까지만 해도 힘을 못 쓰고 발이 질질 끌리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축구에서 골만큼 효과적인 도핑이 과연 있던가. 한 번 동점을 만들더니, 각성하고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다. 연장전까지 잉글랜드를 압도하며 죽자 살자 뛰어다녔다. 주장 모드리치는 사소한 볼터치를 실수해 공을 넘겨주기도 했고, 결승골의 주인공 만주키치는 충돌에 쥐까지 나면서 몇 분을 그라운드에 쓰러진 채 누워있었다. 크로아티아는 그러고 승리를 빼앗았다.
루카 모드리치는 1985년생이다. 마리오 만주키치는 1986년생이다. 서른을 훌쩍 넘겨 운동선수로는 환갑에 가까운 나이. 그러나 그들은 열망 하나로 나이를 꺾어버렸다. 평소의 모드리치와 만주키치를 보던 축구팬이라면 참 낯설었을 것이다. 축구도사 모드리치의 실수, 그리고 만주키치의 침대까지. 평소의 그들이라면 결코 볼 수 없는 플레이였다.
포장하자면 이는 피로와 열망 사이의 투쟁이었다. 발이 떨어지지 않지만, 팀은 어떻게든 결승에 보내려는 국가대표의 의무였다. 위기 앞에서 베테랑은 더욱 강해지는 듯 했다. 특히 만주키치는, 엔트리 한 명이 날아간 최전방을 책임지며 토너먼트 360분 중 348분을 소화했다. 허무하게 날아갈 뻔 했던 크로아티아 황금세대는 이제 월드컵 우승을 앞뒀다.
유로(유럽선수권대회)2008 8강, 2010 월드컵 예선 탈락. 유로2012 조별 탈락, 2014 월드컵 조별 탈락. 유로2016 16강. 그간 '허울 좋지만 실속없는 팀'이라는 비판을 들어야 했던 노장들은 마지막 투혼을 불사르고 있다. 전력의 핵심인 모드리치와 만주키치를 비롯, 크로아티아 황금세대의 모든 일원은 잃어버린 10년의 책임을 짊어졌다.
그래서 좀비가 되기로 했다. 교체를 거부하면서까지 준결승 승리를 지켜냈다. 이제 상대는 그보다 더욱 강한 프랑스다. 공교롭게도 20년 전의 황금 1세대가 무릎을 꿇었던, 바로 그 상대. 한 명이 많은데, 한 경기를 덜 뛰고, 하루를 덜 쉰 채로 크로아티아를 맞는다.
이기면 역사가 쓰여진다. 우승과 복수를 동시에 이룰 수 있는 완벽한 기회. 월드컵 역사상 가장 만화 같은 도전이 되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챔피언스리그 3연패라는 업적은 가까운 시일 안에 재현 되기 힘들 것이다. 그 3년간 레알 마드리드 중원을 꾸준히 지켜온 게 루카 모드리치였다. 발롱도르(올해의 선수)는 매년 골폭죽을 터뜨리던 호날두의 차지였지만, '과연 모드리치 없이 우승할 수 있었을까'라는 물음에는 모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축구도사'라는 별명에 가장 걸맞는 선수였다. 이번 월드컵에서도 대표팀의 모든 플레이를 책임지는 모드리치가 전설이 되기 위한 마지막 도전에 나섰다.
월드컵 우승은 커리어의 정점이고, 전설이 되고자 하는 모든 선수들의 마지막 관문이다. 호날두와 메시조차 이루지 못한 위대한 업적. 메시는 "모든 트로피와 월드컵 우승을 바꾸자면 바꿀 수 있다"고 했다. 모드리치도 결승을 앞두고 같은 이야기를 했다.
"내가 얻은 모든 챔스 트로피와 월드컵 트로피 하나를 바꿀 수 있다."
4년 전 메시는 실패했고 이번엔 모드리치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모드리치가 월드컵 우승을 이뤄낸다면 호날두와 메시로 양분 되던 발롱도르 이분지계 또한 무너질 수 있다. 마지막 커리어가 월드컵과 발롱도르로 점철 된다면, 그는 반박할 수 없는 전설이 된다.
서로 으르렁대는 클럽을 떠나 대표팀에서 최고의 동료가 된 이반 라키티치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모드리치가 발롱도르를 받을 시간이다."
국가를 위한 도전이기도 하지만 개인에게도 큰 의미가 있는 결승전이다.
2년 전 프랑스는 파죽지세였다. 자국에서 열린 유로2016 결승까지 올라갔다. 단 한 번의 연장도 없이, 준결승에서는 월드 챔피언 독일마저 꺾은 개최국의 패배를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상대팀인 포르투갈은 토너먼트 세 경기에서 두 번의 연장전을 치르고 올라왔다. 상대는 크로아티아, 폴란드 그리고 웨일스. 어떤 팀과 굉장히 비슷하다. 바로 2018년의 크로아티아다.
'연장전을 치렀고, 대진운이 따랐으며, 객관적인 전력에서 앞서는' 상대. 공교롭게도 당시의 포르투갈과 크로아티아 모두 레알 마드리드 선수를 주장으로 두고 있다. 황금세대의 시작이라던 프랑스는 한순간 방심했다가 허무하게 우승을 놓쳤다. 호날두에게 국가대항전 우승을 안기며 무한한 명예를 안겨줬다. 이번에도 졌다간 '레전드 메이커'가 될 수도 있다.
차이점이라면 그 당시 포르투갈은 하루 더 쉬었고, 이번 크로아티아는 하루를 덜 쉰다는 점. 여러모로 2년 전보다 더욱 유리함에 틀림이 없다. 그럼에도 포그바는 결코 방심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같은 실수는 없다며 이를 갈았다. 경험 없는 팀이지만 단 한 번의 패배 경험이 무엇보다 크다. 기적과 데자뷰의 싸움. 두 팀에게는 너무나 확실한 동기부여가 있다.
프랑스가 충격의 준우승을 한 2016년, 갑자기 엄청난 신인이 등장했다. 나이 열일곱에 리그앙(프랑스리그)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더니 팀을 챔피언스리그 4강까지 이끌었다. 킬리앙 음바페의 이름은 그 때부터 만천하에 알려졌다.
활약은 한순간이 아니었고 음바페는 여전히 미친듯 경기장을 헤집고 있다. 이번 월드컵에서도 세 골을 기록하며 프랑스의 결승행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것 또한 60년 전 펠레의 데자뷰일까. 펠레는 열일곱의 나이에 결승전 두 골을 기록하며 조국에 우승컵을 안겼다. 이번 결승전 또한 전설의 탄생을 알리는 서막이 될 수 있다. 약관이 채 되기 전에 커리어의 최정점을 찍는 축구천재. 메시와 호날두가 서른을 넘어가는 이 시점에서 음바페가 차기 황제자리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반복되는 비매너로 아직 덜 여물었다는 비난 또한 듣고 있지만, 음바페가 이번 결승전에서 가장 주목 받는 선수 중 하나라는 데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크로아티아의 결승전이 마지막 불꽃이라면, 프랑스의 결승전은 이제 막 타오르는 불길이다. 모드리치와 음바페가 두 팀의 상황을 너무나 잘 대변하고 있다. 양극단에 서있는 두 팀의 피할 수 없는 맞대결이다.
스토리를 저지할 악당은 누가 될 것인가? 누구의 스토리가 평생 남아 구전이 될 것인가? 결승전의 전력 우열이 이렇게 압도적으로 나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드라마가 나오기 더 없이 좋은 조건이기도 하다. 언제나 언더독이었던 한국인으로서, 개인적으로는 크로아티아에 조금 더 정감이 간다. 감정이입 할 팀을 골라 응원한다면 더욱 즐거운 월드컵 결승전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