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라는 성찰
길치인 나는 자주 길을 헤맵니다. 어려선 길을 잃는다는 것이 두려운 일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목적만 보고 달렸을 때 오는 조급증이 아니었나 합니다.
한 때 여행을 즐겨 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도 길을 헤매었으나 그럴 때마다 내 앞으로, 길은 더 없는 풍광을 선물해 왔고 내가 목적했던 길도 함께 데리고 왔습니다. 그래서 처음 목적 했던 길은 덤이었고, 헤매어 돌던 길이 큰 수확이었던 때가 참 많았습니다. 내가 길을 잃어도 외롭거나 두렵지 않은 이유는 길에 대한 이런 나의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길을 떠나도 길은 나를 떠나는 법이 없고 내가 길을 잃고 헤매도 길은 내게 반드시 옵니다. 내가 낯선 길 위에 서게 되어도 잠시 여유를 부릴 줄도 알게 된 것은 자주 헤매는 나에게 길이 주는 기대 이상의 선물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난 후였습니다.
사는 일 또한 잠시 목적이 희미해지더라도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일입니다. 기다림을 즐길 줄 아는 여유를 누리고 그 시간에 주변을 살피느라 정작 돌보지 못한 자신을 걸어 볼 일입니다. 자기 자신의 가장 깊은 곳까지 찾아 들어간 사람은 낯선 존재에 대한 성찰을 가져올 것입니다. 이 또한 길을 알고부터 알게 된 깨달음입니다.
기다림이 주는 여유는 축복입니다. 그러니 서두르지 말 것입니다.
- 2019. 여름. 일기장에서.
아주 오래전 고등학교 친구를 만나러 금산에 가게 된 날이었습니다.
가뜩이나 길을 잘 헤매고 지금처럼 내비게이션이 있는 것도 아니었어서 고속도로가 아닌 길은 무작정 헤매야 했는데 그날도 어김없이 국도로 내려와 낯선 동네를 돌고 돌고 시골들판길까지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아주 멋진 길을 만났는데 나중에 친구가 알려주기를 그 길이 그 유명한 금산 플라타너스 터널길 '산내길'이라고 하더군요.
친구는 헤매는 내가 못내 불안했던지 어디쯤 왔냐고 자꾸 전화를 했고 나는,
"어딘지 몰라~ 그런데 너네 동네 안 나와도 좋다~ 길이 너무 좋아~!" 했던 기억입니다. 아마 길을 헤매지 않고 곧바로 친구에게 갔었다면 멋지고 아름다운 길은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친구는 어떻게 거기까지 갔냐며 걱정이 태산이었으나 나는 무척 반갑고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 길을 아주 천천히 즐기며 운전했던 기억도 덤으로 남아 있습니다. 시 한 편도.
잠시 길을 잃은 그대에게 전합니다. 잃은 것이 아니라 숨 고르는 중이라고. 길은 곧 올 거라고. 그리고 당장 오지 않으면 또 어떠냐고, 더 멋진 길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라고 말입니다.
- 2024. 01. 27. 새벽.
- 산내길에서
/ 정온유
십 년 만에 연락 닿은 친구에게 가는 길
다 가서 헤매어 다른 길로 들어섰다
산내길 비포장도로 플라타너스 터널
이파리에 매달린 부신 햇살 바라보며
목적지를 못 찾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때로는, 아닌 길이라고 돌아설 일 아니다
애시당초 길이란 정해진 것 아니니
가슴에 길 만들어 가고 있는 동안에
꽃잎도 날 위한 그늘 흩뿌려 놓겠지
애써 걸음을 재촉하지 말고 가자
잠시 차를 세우고 숨 고르는 자리에
하루의 옆모습인 양 빛 그림자 평온하다
- 시집 [무릎]<책만드는집>(2014)